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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문객잔>. 모래와 칼이 날리고 지사들의 의기와 애달픈 서사가 날카롭던 오래된 무협영화이다.

때는 명나라 경태제 시기, 주원장의 기상은 서리를 맞은 노각 꼬리처럼 쭈그러든 지 오래였고, 토목의 변으로 정통 황제가 사라진 혼란의 시기였다. 정치와 행정을 장악한 환관들의 전횡은 극에 달했고, 환관들의 시녀 노릇이나 하는 문무대신과 행정 6부는 노루 꼬리보다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나라의 기강은 개족보가 되어 일개 환관이 상서나 대장군을 개 부르듯 오라 가라 할 정도가 되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온 천하를 뒤덮었으나 몇 자 되지 않는 궁궐의 담은 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귀 같은 환관들은 동창이라는 정보경찰을 만들어 온 나라를 사찰하고 감시했다. 게슈타포나 KGB와 같은 정보경찰인 동창은 민정을 감시하고 반대파의 약점을 수집하며 필요한 경우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 동창은 그 대가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요즘 같으면 하명수사하고 출세와 공천을 얻는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듯 명나라 때 환관의 발호는 극심했다. 위충현이라는 환관은 황제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다. 심지어 그가 행차할 때면 많은 문사들과 언관들이 앞장서 구천세를 외쳤고 살아있는 위충현을 기리는 사당도 만들었다. 권력남용을 견제해야 하는 대간과 청요직마저 위충현의 조카, 아들을 자처했다고 한다. 환관에게 아들이라니 짚신에 구슬 감기요, 돼지 발톱에 봉숭아물이지만 그 덕분에 환관이 던져주는 관직을 얻어먹고 살았다. 하지만 나라의 기강이 떨어지면 장마철 호박꽃처럼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는 법이다.

영화 속에서 동창의 수괴 조소흠은 병부상서 양원이 병권을 내놓지 않자 그를 체포한다. 사법부까지 장악하였기에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것은 일도 아니다. 결국 황제를 배반했다는 누명을 씌워 양원을 죽인다. 예나 지금이나 도둑이 매 드는 것은 변함이 없다.

환관들은 양원의 병사들이 충직한 주회안 장군을 중심으로 뭉쳐 봉기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주회안을 유인하여 죽이기로 하고, 양원의 어린 자식들을 서역 변방으로 끌고 간다. 조소흠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검은 화살단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주회안은 애인 구모언으로 하여금 이들을 구출하게 하고, 구모언으로 등장하는 임청하는 ‘동방불패’급의 천상계 검술로 검은 화살단을 한칼에 도륙한다. 일휘소탕 혈염산하가 이런 모습이리라. 양원의 자식들을 구한 구모언은 주회안과 만나기로 한 용문객잔에 먼저 도착한다. 용문객잔의 주인은 금양옥인데, 그녀는 인육만두를 만들어 팔거나 망명자들을 등쳐먹는 도적패의 우두머리다. 장만옥이 연기한 금양옥은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는 천하절색인 데다 전치화살이라는 표창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무공 고수이기도 하다.

야심한 시각 주회안이 객잔으로 깃들이고, 장만옥은 그 주회안에게 매료되어 전치화살 대신 유혹의 눈빛을 던지지만, 정작 주회안은 유혹하지 못하고 애먼 조선 청년들의 심쿵사만 유발했다. 때마침 고수들로 구성된 동창의 선발대가 도착하여 주회안 일행의 도주를 막는다. 뜬금없이 서역 사막에 집중 호우가 쏟아지고, 어수룩하고 탐욕스러운 성문지기와 부하들까지 끼어들면서 객잔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살기가 흐른다. 드디어 동창 본대를 이끌고 조소흠이 도달하고, 주회안 일행은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소흠과 주회안, 구모언, 금양옥 간의 결투로 장식된다. 모래바람이 화면 가득 채우는 가운데, 날카로운 칼날들이 마치 휘파람처럼 날린다. 수십 합이 흐르고 점차 주회안 일행은 절대고수 조소흠에게 밀려 위기를 맞이한다. 결국 구모언은 주회안을 대신하여 조소흠의 칼을 맞고 유사에 빠져 죽는다. 물론 현실과 달리 영화에서는 늘 악당이 패퇴하니 크게 상심할 것은 아니다. 느닷없이 토둔술을 구사하며 나타난 객잔의 주방장이 조소흠을 공격한다. 조소흠은 인육만두나 만들던 주방장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갑분싸 상황이나, 개미가 둑 무너뜨리고, 굼벵이가 담장 뚫는다고 압제는 늘 가장 낮은 보통의 존재들이 쓰러뜨리는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주회안 장군은 쓸쓸히 사막으로 떠난다. 장만옥은 용문객잔에 불을 놓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과 과거를 버린 후 주회안을 따라 사막으로 향한다. 영화는 이렇게 끝나고 그들의 뒷이야기는 알 수 없다. 아마 주회안은 쓸쓸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평생 풍찬노숙 속에서 쫓기다 현상금 몇 푼에 팔린 추적자의 칼에 맞아 모래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 권세에 도전하면 죽음뿐이 아니겠는가.

주회안 장군은 어찌하여 죽는 길을 택했을까? 금주령에 누룩장사 같은 등신 천치일지도 모른다. 다른 대신들처럼 동창에 복종하고 피아 구분을 잘했다면 물에 든 해파리처럼 어느 세파에도 늘 잘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샘은 천 길 바위에서도 솟는 법이고, 개와 달리 늑대는 사료를 먹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남기는 것은 이름뿐이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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