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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원숭이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 이번 실험도 고약하다. 실험장인 스키너 박스 안에 나무를 설치하고 그 위에 바나나를 매달아 놓았다. 물론 공짜 바나나는 아니다.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려고만 하면 가장 질겁하는 물을 뿌려댔다. 원숭이 뇌에 전극을 꼽거나 전기고문을 하는 실험에 비하면 양반이니 너무 분노하지는 말자. 몇 번 짜릿한 물벼락을 경험하자 원숭이들은 아무도 나무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평형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평형, 평정 상태를 파괴하고 극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은 원래 있던 원숭이 중 한 마리를 빼고 대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넣는다. 물벼락을 맞아본 적 없는 신참 원숭이는 바나나를 보고 환장하여 나무에 오르려고 한다. 그러자 고참 원숭이들이 질겁하며 신참을 말렸다. 물정 모르는 신참놈 때문에 자신들까지 물에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원숭이들이 말리자 신참은 나무에 오르는 것을 단념했다. 이런 식으로 원숭이를 하나씩 빼고 그 자리에 신참 원숭이들을 채워 넣었다. 매번 신참들은 나무를 오르려다 다른 원숭이들의 제지를 받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스키너 박스에 원래 있었던 원숭이들은 모두 빠지고 물을 맞아본 적이 없는 신참들로만 채워졌다. 하지만 그 어떤 원숭이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물을 맞은 원숭이들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관행이 되어 울타리 안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실험이 이뤄졌다. 과학자가 진료대기실에 미리 지시를 받은 실험자 10명을 앉아 있게 했다. 실제 환자가 진료대기실에 들어오면 실험이 시작된다. ‘삐’ 하는 버저 소리가 들리면 실험자 10명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다. 이를 본 환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 이내 엉거주춤하고, 곧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섰다 앉는 것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동조 효과, 동화 본능 때문이다. 처음 환자가 동조 현상을 보이면 다른 환자를 집어넣고 실험자 1명을 뺀다. 두 번째 환자도 첫 번째 환자와 동일한 반응을 한다. 결론은 원숭이와 동일하다. 10명의 실험자가 모두 빠지고 환자들로만 채워져도 그 진료대기실에 있는 환자들은 버저 소리에 모두 일어섰다 앉는 행동을 하게 된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그 행동은 대기실을 지배한다.

물론 모든 관행과 습관에는 그 배경이 있다. 유대인이 피를 빼고 고기를 먹는 것이나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피하는 것, 여자에게 히잡을 씌우는 것 등은 당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이 특별히 나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현상유지바이어스(status quo bias)나 손실회피성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나 비합리적이다.

나이트 샤말란이라는 영화감독이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유주얼 서스펙트>) 이후 가장 저주받을 스포일러인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를 낳은 <식스센스>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빌리지>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이다. 기계도, 전기도, 범죄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매우 무서운 금기가 있다. 마을 사람이 숲으로 들어가면 그 숲에 있는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다. 늘 역대급 반전을 보여줬던 감독의 작품치고는 극히 시시한 공포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배경이 현대라는 점에 있다. 이 마을은 현대 미국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과거 도시에서 범죄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모여 이 마을을 만든 것이다. 현대문명이 범죄를 낳는다고 믿는 그들은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숲속의 ‘괴물’을 만든 것이다.

전 세대의 규범과 기억은 다음 세대를 억압한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은 때로는 세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 가두기 위해 공포와 거짓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한 기억이 억압으로 작용할 때 새 세대가 할 일은 타인의 과거와 주어진 미래에 저항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도전하고 주변으로부터 달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강화된 기억과 그 부작용인 공포와 무분별한 추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작된다. 물론 변화는 어렵고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거짓과 강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관성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에서도 작용’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야말로 실체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살아있는 존재라 함은 어떤 과정의 이른 단계에서 나중 단계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듯 본질에 따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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