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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따르면 북한은 올 들어 36차례나 미사일을 발사했다. 동해와 서해상으로 수백 발의 포격을 감행했고 수백 대의 전투기를 동원하는 무력시위도 벌였다. 우리나라도 대응조치를 취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포격을 가했다. 지난달 31일부터 5일까지는 한·미의 최첨단 전략자산 등 항공기 240대가 참여한 비질런트 스톰 훈련이 진행되었다. 

외부에서 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전쟁 위기의 고조이다. 언제이냐가 특정되지 않았을 뿐 한반도에서는 결국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질 듯도 싶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사뭇 덤덤하다. 휴전 상태가 7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전쟁에 대하여 엄청 둔감해진 탓이다. 정치인의 입에서 전쟁 불사 같은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는 것을 보면 둔감한 게 아니라 아예 무감해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고대 중국에는 전쟁이 일상화됐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을 얼마나 일삼았는지 시대 이름이 ‘전국(戰國)’, 그러니까 ‘싸우는 나라들’일 정도였다. 일곱의 강대국이 저마다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자 약육강식의 싸움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렇다보니 전쟁이 너무도 쉽게 결정되고 실현되었다. 때마침 경제력이 크게 신장되어 전쟁 수행 역량도 증대되었고 인구도 팽창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대규모화되고 장기화됐다. 급기야 대량학살도 자행되었다. 명분은 부강한 국가 건설이었지만 전쟁의 실상은 사람을 죽여 온 들판과 온 성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땅에게 사람 고기를 먹이는 것으로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될 수 없다”(<맹자>)는 절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규했던 맹자였건만 ‘의로운 전쟁(義戰)’은 긍정했다.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폭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또 지속 가능한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죽은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전쟁에선 개인의 존엄한 죽음이라는 당연한 권리조차 실현 불가능하다. 나 ‘아무개’의 죽음으로 기억되지 않고 그저 집단이나 사건의 이름으로 기억될 따름이다. 그러니 전쟁은 그 단초서부터 철저히 막아야 한다. 다름 아니라 나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연재 | 김월회의 행로난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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