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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팍팍해진 요즘 퍼스트 펭귄의 인기와 몸값이 많이 올라간 것 같다. 출판 시장에서도 ‘~할 용기’ 책 제목이 유행하고 실제로 베스트셀러다.
퍼스트 펭귄은 모두가 머뭇거리며 눈치만 보고 우왕좌왕할 때 먹이를 구하기 위해 차가운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의 살길까지 열어준 용감한 개척자를 상징한다. 40대 중반이 되도록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다양한 실패 경험만 풍부한 나에게 퍼스트 펭귄의 대표적 인물이라며 대기업에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오죽 답답하고 길이 안 보이면 경영학자도 아닌 지리학자에게 회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물어볼까 싶었다. 돈 버는 데는 관심도 재주도 없는 나에게 찾아온 그들이야말로 용감한 퍼스트 펭귄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성공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편안하게 살아오신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삶의 지혜였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가만히 있으면 성공은커녕 생존조차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모두가 불안한 상황에서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어려운 시험과 치열한 경쟁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내 생각은 버려야 한다. ‘복잡한 세상에 오직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는 편협한 세계관, ‘항상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엇보다 튀지 않아야 살아남는다’는 한국식 생존법을 반복 학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바다에 먼저 뛰어들려면 우선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잘 살아야 진짜 해피엔딩이다. 바닷속에서 우물쭈물하다가 천적에게 잡혀 먹힌 펭귄도 있을 것이고, 너도나도 똑같은 바다에 집중적으로 뛰어들다 보니 먹이가 금방 부족해져 굶어 죽는 펭귄도 생길 수 있다. 결국 바다에 뛰어들기 전 충실한 준비 과정이 펭귄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즉, 중심부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적합한 주변부를 계속 탐색하며 지리적 상상력을 기른 펭귄이 생존에 유리하다. 어디로 가야 먹이가 풍부하고, 나에게 맞는 바다가 어떤 지역에 있는지, 내가 행복한 곳은 어디인지…, 계속 고민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미리미리 길러둘 필요가 있다.
고달픈 생활에 지치고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길들여진 평범한 한국인들이 퍼스트 펭귄으로 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떨어질 염려가 없는 대륙의 중심에 작은 자리라도 얻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높고 안전한 곳에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펭귄들에게 바다는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다.
나 역시 원래 그렇게 용감한 청춘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정해진 틀에 맞춰 열심히 살아온 소심한 모범생에 불과했다. 대학교 전공이 싫어서 빨리 취업하고 싶었고 대기업에서 최초로 해외영업 여성전문인력을 공채한다고 해서 지원했다. 시험을 잘 봐서 대기업 반도체 미주 수출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매일 사표를 쓰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모든 여사원이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고 장시간 일하다 쓰러질 정도로 피곤해도 쉴 곳은 여자화장실밖에 없었고 결혼하면 퇴직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매일 세계지도를 보면서 한국을 탈출할 준비를 하던 중 IMF 외환위기 직전 국제대학원이 생겨 얼떨결에 동남아 지역전문가의 길로 들어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워킹맘의 지옥’이라는 한국에서 많은 실수와 다양한 실패를 경험했고 외국에서 치열하게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계속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숨통이 될 만한 공간을 지리학자로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좀 더 열심히 찾았을 뿐이다. 미끄럽고 딱딱한 얼음 위에서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창피하고 아파도 다시 일어나 눈보라 속을 계속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모두가 머뭇거릴 때 폼 나게 바다에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의 용기는 지금 현재의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어서 절박한 심정으로 모험을 감행하면서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새해를 맞아 행복한 변화를 꿈꾸는 당신에게 퍼스트 펭귄의 생존 비밀, 지리적 상상력을 하나씩 전수해 주고 싶다.
■지리꿀팁
북극은 바다, 즉 북극해이고 남극은 대륙이다. 평균기온 영하 34도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남극대륙이 고향인 펭귄은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북극곰과는 달리 바다를 많이 무서워했다. 미끄러운 빙판 위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걷다가 거칠고 위험한 바다에 뛰어든 작은 퍼스트 펭귄의 용기가 그래서 더 대단한 거다. 아무도 북극해에 뛰어든 퍼스트 북극곰을 기억하지 않는다.
김이재 |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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