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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에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나눈 인사말은 “안녕, 병신년에 만나요”였다. 시간이 2016년 1월1일 0시로 바뀌었을 때 인사는 “안녕, 다시 만나 반가워요”였고. ‘병신년’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 해를 보낼 때에는 장난처럼 쓸 수 있지만 정작 그것을 새해로 맞을 때는 이름을 부르기가 어감상 ‘거시기’한 것이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닌지 새해 아침 인사로 ‘병신년’보다는 띠 동물인 ‘붉은 원숭이’ 그림을 보내온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고 서로의 인연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에 띠가 상당한 역할을 한다. 나이가 몇이냐고 바로 묻기보다는 무슨 띠냐고 묻는 게 ‘문화적’이고 ‘띠동갑’이라고 하면 괜스레 친밀감을 갖는다. 때로 띠 동물에 의해 그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이 결부되기도 한다. 가령 ‘58년 개띠’나 ‘황금돼지띠’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띠 동물과 사람의 관계가 가지는 의미가 혈액형, 태어날 때의 별자리에 의해 인간의 기질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을 만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병신년의 띠 동물 원숭이는 한자로 원(猿), 원성(猿猩)이라고 씌었고 원성이가 원숭이가 되었으며 우리말로는 ‘납’이다. 병신년의 ‘납 신(申)’이라는 글자의 ‘납’이 바로 원숭이를 지칭하는 것이고 ‘잔(재빠른, 작은)+납(원숭이)+이(접미사)’로 발달해 원숭이띠를 잔나비띠라고도 한다. 병신년의 병(丙)이 오행의 화(火)에 속하고 불(火)은 붉으므로 올해가 ‘붉은 원숭이’의 해가 된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원숭이는 <서유기>의 손오공일 것이다. 그 다음이 영화 <혹성탈출>의 ‘시저’쯤? 내게 문학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원숭이는 시인 정철(鄭澈 1536~1593)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술 권하는 노래)>에 나온다. 이를테면 ‘(살다 죽어)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쇼쇼리 바람 불 때 뉘 한 잔 먹자할꼬 하물며 잔나비 휘파람 불 제 뉘우친들 엇더리’에 나오는 그 ‘잔나비’이다. 무덤 위로 메아리치는 원숭이의 휘파람은 ‘왜 좀 더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오지 않고 벌써 이렇게 와서 누웠느냐’는 비웃음이라기보다는, 당시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논외로 하고, 그저 무덤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에 가깝다. 그럼에도 잔나비의 휘파람이 새소리보다 더 의미가 도드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원숭이가 사람을 닮은 영장류이기 때문에 인간사 희로애락에 대해 뭔가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것이다. 십이지의 돼지, 개, 닭, 말, 뱀, 용, 토끼, 호랑이, 소, 쥐가 휘파람을 부는 게 아니다. 오직 원숭이만이 지상의 술을 다 마셔 없애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휘파람을 분다. 그 원숭이를 끌어들인 게 이 시의 절묘함이다. 술에 목숨을 걸기 전에 배웠던 시인데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렬한 탐미적, 파괴적인 면모를 느꼈던 것은 사람도 자연도 아니면서 두 존재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는 원숭이 덕분이었다.
이십여년 전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원숭이 이야기를 들었다. 잣이 많이 나는 어느 지방에서 원숭이를 수입한 적이 있었다. 키 큰 잣나무 꼭대기에 열리는 잣을 따려면 사람이 일일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흔들어 따거나 대규모 수확을 할 경우 헬리콥터 날개에서 부는 바람의 힘으로 떨어지게 했는데 위험성과 비용을 줄여보려고 동남아에서 원숭이를 들여온 것이다. 잣나무 주인들의 의뢰를 받은 사육사가 원숭이들에게 잣을 따는 훈련을 시켰다. 모형 나무에 잣을 매달고 거기에 원숭이가 올라가게 한 다음 잣송이를 따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면 먹을 것을 주는 방식으로. 훈련은 성공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숭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형 나무의 잣을 따러 가는 수준에 이르렀고 예상보다 훨씬 일찍 실전투입이 결정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숭이는 울창한 잣나무 숲의 잣나무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이젠이나 끈 같은 도구가 없는데도 속도는 사람과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원숭이가 나무 중간쯤까지 가더니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갑자기 털 고르기를 시작하고는 계속 털만 다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아래에서 아무리 독려를 하고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그냥 아래로 내려왔다. 그 동네를 떠날 때까지 거의 필사적으로 털 고르기를 계속했다. 잣나무에서 나온 송진이 털에 묻고 나무 부스러기, 먼지들이 송진과 함께 털에 들러붙었기 때문이었다. 원숭이에게 털을 고르는 일은 사람이 외출할 옷을 골라 입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생존적·사회적 의미가 있다. 어쨌든 원숭이를 이용해 잣을 따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십이지의 원숭이,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원숭이, <장진주사>의 휘파람 부는 원숭이, 잣 딸 생각은 하지 않고 미친 듯 털 고르기만 하는 원숭이의 공통점은 모두 인간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그 원숭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할 말이 있을 것이지만 원숭이는 사람의 말을 모르므로 누군가 통역을 해줄 수밖에 없겠다. 내가 소매를 걷고 나선다면 이렇다.
“오, 스스로 현명하다고 칭하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우리가 필요할 때는 속을 갈라 간이라도 빼줄 듯하다가도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 봤냐는 듯 헌신짝처럼 내팽개치지요. 당신들이 당신들끼리 그러하듯이. 원숭이해라는 올해도그러다 말겠지요. 제발 우리가 당신들에게 하는 것처럼만 하시오. 우리는 당신들에게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이용도 하지 않고 붙잡아다 부려먹지도 않소.”
그러고 보면 올해에는 시민의 한 표 한 표 앞에 권력자들이 머리를 잠시 조아리는 선거가 있다. 그것이 병신년의 ‘기적’이 될지, 여느 때처럼 ‘조삼모사’의 공약에 현혹된 유권자의 ‘표 주고 뺨 맞기’로 끝날지 아직까지는 궁금하다.
성석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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