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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원자폭탄은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수소폭탄의 출현으로 인류는 파멸할까봐 괴로워하는 상황에 처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1952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을 지켜본 뒤 몸서리를 쳤다. 1961년 10월 구소련 영토인 북극해의 노바야제믈랴 제도에서 섬광이 솟았다. 히로시마 원자탄보다 3800배 강한 수소폭탄이었다. 버섯구름은 높이 60㎞까지 퍼졌고, 100㎞ 밖 사람까지 3도 화상을 입었다. 3000㎞ 떨어진 핀란드의 유리창이 깨졌다. 같은 시간 태양이 방출한 양의 1%에 해당되는 에너지였다. 이 수소폭탄에 차르봄바(황제의 폭탄·Царь-бомба)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소탄 실험으로 지진파 관찰하는 기상청 상황실_경향DB
‘수소폭탄의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의 핵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1908~2003)였다. 미국은 2차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계획(맨해튼 프로젝트)을 진행하고 있었다. 텔러 역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아니라 수소폭탄 개발에 홀로 온 정신을 쏟았다. 다른 업무는 조교인 클라우스 푹스에게 맡겼다. 푹스는 훗날 소련 스파이로 밝혀졌고, 미국의 수소폭탄 계획을 소련에 넘긴다. 이것이 미·소 간 수소폭탄 경쟁의 기폭제가 됐다. 어쨌든 텔러의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꼬마’로 만들었다. 원자폭탄은 ‘핵분열’이라는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방출하는 원리로 제작됐다. 반면 수소폭탄은 태양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과정인 ‘핵융합’의 개념을 도입했다. 무거운 원소에서는 핵융합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가장 가벼운 수소원자의 핵을 융합시켰다. 이 과정에서 핵융합에 필요한 고온(약 5000만도)을 얻어내야 했다. 고온을 얻으려면 원자폭탄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수소폭탄은 원자폭탄(1차 폭탄)이 방아쇠가 되어 핵융합 장치(2차 폭탄)를 터뜨리는 방법으로 원자폭탄 1000배 이상의 폭발력을 얻어냈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핵융합’이라는 단계를 거쳐 극강의 무기가 된 것이다.
문제는 단계만 더 추가하면 ‘차르봄바’와는 비교도 안되는 ‘수소지옥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952년 ‘원자전쟁이 벌어지면 생존자는 2000만명 중 1명’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지금이라면 70억명 중 350명만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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