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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미있어서 끝이 안 나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있다면, 내겐 임꺽정의 이야기가 그랬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을 처음 읽었을 때 아홉권이나 되는 그 소설에 완전히 빠져버렸었다. 한권 한권 읽을 때마다 한권씩 읽어나가는 게 뿌듯한 게 아니라 한권씩 줄어드는 게 아쉬웠다. 월북작가인 홍명희라는 이름이 금기어여서 저자의 이름조차 홍벽초였던 그 소설은 미완으로 1980년대에 출판됐었다. 소설 자체가 미완이기도 했지만, 첫 출판을 할 당시에는 그 책 자체가 미완이었다. 나중에 10권의 개정판으로 출판되면서 홍벽초는 홍명희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미완이었던 화적편의 뒷부분도 전부 실렸다. 나는 그 개정판을 다시 읽으면서, 여전히 그 소설을 전부 읽어치우는 게 아쉬웠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 누구나 이 소설이 나처럼 재미있을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책에는 쓰여지는 시기의 숨결과 함께 읽히는 시기의 호흡도 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민중이란 말을 끼고 살던 시절이었고, 민중의 영웅적인 역사로 위로를 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민중의 혁명이나 봉기, 혹은 궐기 등에 관한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임꺽정은 달랐다. 달라도 매우 달랐다. 홍명희의 소설 속 임꺽정은 영웅이라기보다는 그저 도둑 일당의 두목 정도로만 보인다. 영웅적인 결의도 없고, 시대에 대한 대의도 없고, 때때로 매우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사람도 그냥 막 죽이고, 여자에 빠져 도당을 와해될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는 보스로서의 결단보다는 그저 인간적일 뿐인 심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과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낡은 세상이 나쁘기 때문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을 도둑으로 만드는 세상, 그래서 누구도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죄짓고 싶지 않으나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이 틀려먹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이 이야기에 빠져든 것은,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너무나 사람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쁜 정치, 나쁜 체제하에서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오랜 세월 전의 배경을 담고 있는 소설이고, 그 소설이 쓰여진 시기가 또 오래전이었음에도, 이야기는 다시 내 시대의 것이기도 했다.

이 소설에는 젊고, 투지에 가득 차 있으며, 건강한 도덕심으로 무장한 진보적 정치가 조광조가 나온다. 조광조의 진보적인 정치실험이 성공했다면, 임꺽정은 도둑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소설에서 말하는 바는 그렇다. 그러나 조광조는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타협을 몰랐고, 자신의 대의에만 충실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에 젊은 조광조에게 매료되었던 임금은 곧 그 강직함이 불편해졌고, 나중에는 짜증스러워지기까지 하다가, 위협적인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실패하고 그는 실각한다.

소설에는 힘이 있다. 소설 임꺽정을 읽은 후 내게 조광조는 언제나 소설 속의 젊고 진보적인 정치적 혁명가로 기억된다. 시대가 달라져도 그 시대에 맞춰 변주해가며 조광조의 투지를 떠올리게 된다. 당시의 임금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당시의 시대가 조금이라도 더 유연했다면, 그러면 조광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오히려 올바른 질문은 조광조가 조금 더 현명했다면 당시의 군주제에 보다 더 적절한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대를 감당할 만큼 그가 조금 더 유연하거나 정치적이거나 현명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군주와 그 군주를 둘러싼 권력층에게만 한계였던 것이 아니라 조광조와 그의 젊은 동지들에게도 한계였던 것이 분명하다. 정치는 시대와 함께 가고, 그 시대와 함께 진보한다. 물론 오늘날, 그 시대란 말은 국민의 뜻, 국민의 의지로 표현되는 것이겠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조광조의 묘와 그를 기리는 서원이 있다. 잘 가꿔져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하게 유적지로 조성되어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정한 마음도 들고, 서운한 마음도 들고 한다. 소설 임꺽정 덕분이다. 조광조가 역사책 속의 한 인물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살아있던 인물로 내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묘역이 길가에 있어서 그 길가에 잔뜩 붙어 있는 현수막들을 동시에 본다. 6·13 지방선거가 끝난 후, 당선 감사 현수막도 있고 낙선인사 현수막도 있다. 선거차량들이 주차해있던 길은 이제 비워졌다. 선거 운동의 풍경이 일부 변해서 요란하게 확성기를 울려대는 대신 말 없이 허리 숙여 인사만 하던 선거운동원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하고 싶었을 수많은 말을 인사 속에 전부 녹여내야 했을 그들 중 누구는 당선되었고 누구는 낙선했다. 나는 그들 중의 누구를 뽑았고 누군가는 뽑지 않았다. 뽑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내가 누구를 뽑았는지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정말로 좋아서 뽑은 사람도 있고 그나마 나아보여서 찍은 사람도 있다. 선거 이튿날 결과가 전부 나오면 그래서 좀 허탈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 좀 울컥했다. 엄청난 지지와 엄청난 실망, 혹은 분노가 동시에 보였다. 집권당이 엄청난 지지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울컥했던 이튿날 아침,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부디’라는 것이었다. 부디, 제발, 잘하기를.

오늘날은 임꺽정의 시대도 아니고, 임꺽정을 도둑으로 만든 중종과 명종조의 시대도 아니다. 부당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 도둑이 될 사람은 없다. 그렇게 되어야 할 사람도 없다. 정당한 것이 정당한 자리에 있도록, 이야기는 이야기로 재미있을 수 있도록, 평범한 사람이 부당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들의 정치가 넓고 반듯하고 겸손하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그야말로 얼마나 엄청난 기회인가. 그러니, 부디, 제발.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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