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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라는 책이 있다. 1950년에 출간된 레이 브래드베리의 소설로 에스에프장르의 고전으로 일컬어진다. 스물여섯편의 길고 짧은 소설들이 연작 형태로 구성된 이 소설은 지구인들의 화성 이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는 지구의 탐사대가 최초로 화성에 도착하는 것이 1999년으로 되어 있다. 소설을 출간할 당시로 보면 약 50년 후의 미래지만, 현재의 우리에게는 이미 20년 전의 과거가 되어있다. 그러나 소설의 시점으로 보자.

1999년 화성에 첫발을 내딛고 그 후 정착촌을 건설하게 될 때까지 화성에 도착했던 지구의 탐사대원들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다. 초대받지 않은 지구인의 방문을 침입이라고 여긴 화성인들이 그들을 오해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반면 탐사대원들이 바란 것은 화성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해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 환영한다는 인사를 듣는 것. 이 먼 곳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는 위로를 받는 것. 불행히도 탐사대원들은 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그 결과 목숨까지 잃는다. 그 탐사대원들이 화성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렇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소설 속 대사는 아이러니하다. 거대한 세계가 조우했을 때 가장 큰 난관은 서로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화성이 아니라 다른 별이더라도, 그 다른 별에 생명체 같은 것은 없다하더라도, 이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만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방식을 이해한다는 뜻일 터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충돌이거나 파국이다.

<화성 연대기>의 파국은 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네번째 탐사대가 화성에 도착했을 때 화성은 이미 죽은 별이나 다름없었다. 번번이 화성인들에게 몰살을 당했던 지구 탐사대원들은 엉뚱한 방식으로 복수를 한 셈이었는데, 그들이 본의 아니게 퍼뜨린 병원균이 화성인들을 거의 전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병원균은 수두였다. 지구에서는 ‘어린아이도 못 죽이는’ 그 수두 병원균은 화성 전체를 무너뜨려버렸다. 그리하여 화성은 거대한 무덤, 역사와 문명과 예술의 기록으로만 남은 무덤이 되어버렸다.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 4차 탐험대의 화성탐사기는 세계종말의 비극적인 서사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두 개의 달이 비추는 화성이나 한 개의 달밖에 없는 지구거나 종말은 같다. 탐사대의 일원인 스팬더는 화성의 종말을 목도한 후 그 슬픔과 공허함에 홀려버린다. 지구인이 화성에 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정착하기 시작한다면, 화성은 영원히 이렇게 죽은 별이 될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다른 별을 죽이면서까지 지구가 끝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별조차 전쟁과 부패와 편견과 갈등으로 거의 다 죽여놓고는 이제 와서 대신 다른 별을 꿈꾸는 지구가, 그 지구의 사람들이 스팬더는 역겨웠다. 그래서 스팬더는 지구인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마지막 화성인이 될 것을 선택한다. 장엄하고, 공허하고, 슬픈 서사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70년 전, 아직 어떤 우주선도 화성 궤도에조차 진입하지 못했던 때에, 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희망 대신 이렇듯 슬픔에 주목했다. 물론 이 소설의 스물여섯편 짧은 얘기들 중에는 화성에서 농사에 성공하는 인물의 분투가 나오고, 화성 최초로 핫도그 가판대를 여는 인물도 나온다. 일상은 어쨌든 어디에서나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 일상에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역사가 된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후,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책이 대출 중이었다. 과학계에, 그토록 어려운 영역에, 대중적인 유명인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스타가 됐지만 우리가 상대성이론을 알게 된 건 아인슈타인이 스타였기 때문이다. 공간이 접히고, 시간은 절대성의 영역을 벗어나고,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고…. 기타 등등…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일까. 물론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상대성이론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 단어만이라도 말이다.

호킹의 대중물리학 책들은 워낙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의 물자도 모르지만 호킹을 통해 블랙홀이라는 단어에 친숙해지고, 다중우주니 평행우주니 하는 말을 배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책은 못 읽었더라도 호킹이 등장하는 기사라도 읽었을 것이다. 아무리 쉽게 쓰인 책이라도 책은 어렵지만, 기사는 쉽다. 실질적인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짧은 기사에 ‘천문학적’인 내용이 담길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기는 하다.

호킹이 지구 종말을 경고하면서 화성으로의 이주를 대안으로 내놨다는 기사는 충격적이면서도 익숙하게 여겨진다. 물리학이나 천문학에서보다 영화나 소설에서 더 많이 그런 상황을 보여주었고, 그 우주는 진짜가 아님에도 더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인 것도 있을 것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의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니.

<화성 연대기>는 전쟁이 일어난 지구로 화성 정착민들이 모두 돌아가 버린 후, 마지막으로 화성에 남겨진 두 지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독한 지구인, 고독한 별의 모습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고독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구는 여전히, 영원히 온갖 문제의 근원이다.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우주전파를 통해 전해져오기도 전에 정착민들은 하늘에서 불타는 지구를 봤다. 그들의 어머니 별, 그들의 존재의 근원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전쟁이면 별을 다 불태울 정도였을까.

화성 이주가 지구 종말을 대비한 대안이라는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도 봤는데, 그 내용들이 대개 이랬다. 지구나 잘 보살피기를. 그 말에 빈정거림이 느껴진다면, 이렇게 고쳐서 말하고 싶다. 지구를 잘 보살피기를.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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