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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다들 글쟁이인 데다 나이 차가 많지 않아 부담이 없는 자리다. 20대 초·중반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여서 서로 막역하다. ‘군대 가서 축구한 얘기’가 자주 나와도, 때로 정치나 종교 관련 이슈가 불거져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그만. 뒤끝이 없다. 오륙년 전만 해도 아이들 교육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곤 했는데 자녀들이 다 크고 나자 화제가 달라졌다. 단연 건강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 

머리카락이 빠진다, 시야가 좁아진다, 귀가 잘 안 들린다, 잇몸이 약해진다, 허리가 아프다, 목덜미와 어깨가 뻐근하다 등등 몸이 보내오는 신호를 늘어놓는가 하면, 집중력과 기억력 특히 초단기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진다는 둥 하소연이 이어진다. 무슨 자랑거리도 아닌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로(早老) 경진대회’에라도 참가한 것처럼 자기 증세를 과장하고 나선다. 얼마 전부터는 치매 예방법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그중 하나가 탁구다. 탁구가 유연성과 민첩성을 좋게 하고 근육량을 늘려주기 때문에 치매에 걸릴 확률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 쓰는 몇몇 후배들은 만나기만 하면 탁구 얘기다. SNS에도 탁구하는 사진을 자주 올린다. 관련 용품을 서로 선물하기도 한다. 그중 한 후배가 문학상을 받았을 때 탁구 동호회 회원들이 현수막을 들고 수상을 축하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달에는 인천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다가 역 구내에 탁구장이 들어선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후배들 말에 따르면 탁구가 생활체육의 총아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탁구에 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다. 그중 하나가 ‘토지 탁구’다. 10여년 전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관에 잠시 머무를 때, 30여년 만에 탁구와 다시 만났다. 창작실 입주 작가 중에 ‘경력자’가 몇 있어서 점심과 저녁 시간에 자주 라켓을 잡았다. 문제는 승패였다. 내기를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진다고 해서 명예에 금이 가는 것도 아닌데 몇 번 지고 나면 다들 안색이 불편해지곤 했다. 사실 승부를 가리는 모든 경기가 그렇다. 지면 아프다. 내가 바둑이나 장기를 배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후배와 새로운 룰을 만들기로 했다. 승패가 없는 탁구. 기존의 점수 매기는 방식을 버리고 대신 공을 주고받는 (랠리) 횟수를 점수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 룰을 적용하면 상대방은 물리쳐야 하는 공격 상대에서 함께 가야 하는 배려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서로 상대를 배려해야만 랠리가 길어지기 때문에 전혀 다른 생각과 능력이 필요하다. 후배와 나는 탁구를 ‘인간의 얼굴을 한 기록경기’로 전환시켰다고 환호했지만, 아무도 우리가 개발한 ‘배려 탁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원규 시인의 시 중에 ‘속도’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토지문학관에서 실험한 ‘새로운 탁구’가 떠오른다. 시 ‘속도’는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를 단박에 뒤집어버린다. 토끼와 거북이는 서로 만날 수가 없을뿐더러, 만난다 하더라도 왜 거북이가 사는 바다가 아니고 토끼가 사는 육지에서 만나는가라고 반문한다. 오만방자한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라는 시인의 질타는 ‘왜 백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으로 확대된다. 느림을 기준으로 하면 기존의 달리기 순위는 백팔십도 달라진다. 말할 것도 없이 토끼가 꼴찌다.    

모임 친구들이 탁구장에 나가자고 권유하지만 아직 라켓을 구하지 못했다. 승패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여전히 민망한 데다 체력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그 반작용일까. 스포츠 중계방송을 더 많이 본다. 겨울에는 유럽 프로축구, 봄부터는 미국 프로야구.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승부의 세계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한계의 극복, 정체성과 결속력 강화, 대리 만족 등 순기능이 여럿이지만 부정적 측면도 있다. 그중 하나가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구기 종목에서 탁월한 기량이란 상대방을 ‘합법적으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술이 그런 것처럼 스포츠도 현실을 반영한다. 승자독식으로 요약되는 돈(힘)의 논리가 프로 스포츠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프로 스포츠와 직결되는 엘리트 스포츠는 국가(민족)주의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후배와 함께 실험한 ‘배려 탁구’나 이원규 시인이 제안한 ‘늦게 달리기 경주’는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상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승패에 기반한 경쟁사회, 속도를 우선시하는 산업문명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스포츠도 바뀔 것이다. 아니 먼저 바뀔지도 모른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풀뿌리민주주의에 있듯이, 생활체육이 현대 스포츠의 폐해를 넘어서는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탁구는 기존의 힘의 논리를 무력화하고, 늦게 달리기 경주는 생산력 제일주의를 뒤흔들 수 있다. 인간으로부터 존엄을, 문명으로부터 지속 가능성을 앗아간 기존의 관계와 가치를 전환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다. 경쟁에서 상생으로, 속도에서 방향으로, 소유에서 존재로. 이 거대한 전환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예술과 체육이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제도와 규칙 안에서 그 너머를 추구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와 체육인 아니었던가. 이들이야말로 미래를 먼저 사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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