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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진행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강독이 세 번째 세션을 맞이한다. 이번 강독에서는 18~19세기 후세대 철학자에 의해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의 후세대 철학자에 대한 반응을 다룬다.

지젝에 따르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1787년에서 헤겔이 사망한 1831년까지 44년은 사유의 강도가 집중된 시기다. 인간의 사유가 정상적으로 발달했다면 수세기, 아니 수천년에 걸쳐 일어났을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면서 후세대에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는 후학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지젝은 후학에게 극복된 전세대 철학자가 후학에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피는 것은 철학사를 다루는 가장 재미있고도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16강을 마치고 17강을 시작하는 강독이 이제 겨우 제3장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속도라면 전체 14장, 1800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을 모두 읽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빨리 가도 1년은 더 걸리는 대장정이다. 책 하나 읽는 데 1년이 더 걸리는 강의를 누가 견딜 수 있을까. 물론 긴 시간 강독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플라톤에서 바디우와 아감벤까지, 불교와 기독교, 공산주의와 양자물리학, 동물과 유령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넘나드는 지젝의 이 역작을 대충 읽어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장기 강좌로 치면 지난해 봄에 시작한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은 더하다. 한 줄, 한 줄을 새롭게 번역하고, 개념 하나 하나를 따져가며 진행 중인 <에티카>의 진도는 전체 5부 중에서 이제 겨우 2부를 마무리하고 있는 정도다. 책을 다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50강은 더 필요하다. 이는 최근 시작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강독도 마찬가지다. 10강에 걸쳐 주요 부분을 강독했으나 이것으로는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새롭게 찬찬히 읽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니 전체를 45강으로 계획하고 진행 중인 <맹자집주> 강독이나 이와 비슷한 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는 그리 길지 않은 강의에 속한다. 전체를 24강으로 계획하고 최근 시작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은 단기 강좌라고 해도 된다.

아예 끝이 보이지 않는 강좌도 있다. 25강에 걸쳐 <유마경>과 <미란다왕문경>을 읽은 뒤 ‘중론’ 강의를 시작하는 불교경전 강독이 그렇다. 이 강독은 강의를 진행하는 스님의 지적 여정에 따라 유식, 불성론, 화엄, 선불교 등으로 끝없이 넓이와 깊이를 더해간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로크, 홉스 등 근대 철학자의 저작 읽기에서 시작한 근대철학 고전 강독도 끝을 생각하지 않은 강의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3~4주에 한 권씩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하며 우리말로 번역된 주요 철학 고전은 모두 섭렵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서 시작해 소피스트와 플라톤을 거쳐 현재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을 진행 중인 서양 고전철학 읽기는 끝이라도 보인다. 스토아학파나 중세 철학 정도에 이르면 책읽기가 일단락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 파이데이아 대학원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지금까지 대학원 강좌를 몇 개 청강했는데, 이 강의에 대한 학점이 인정되는가? 대학원 수학 기간이 3년이라고 했는데, 필요에 따라 휴학을 하며 공부할 수는 없는가?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이곳에서 진행 중인 공부를 생각하니 답하기가 난감해졌다. 이곳의 대학원이란 것이 공부를 보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 2~3년이면 ‘공부를 마치는’ 기존의 제도권 대학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파이데이아 대학원은 몇 학기 등록하며 학점 받고, 학점이 차면 졸업해서 공부를 마치는 곳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또는 선생이나 동료가 보기에 공부가 어느 정도 여물면 글을 쓰고 저서를 발표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공부는 끝없이 계속된다. 이는 학점이나 졸업, 진학이나 취업 등을 매개로 교수와 학생의 계약 관계를 맺고, 졸업을 하면 공부와는 결별하는 현 제도권 대학과는 다르다.

처음 장기 강좌를 시작할 땐 걱정도 없지 않았다. 강독에 참여하는 이들이 긴 시간의 강독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우였다. 이를테면 <에티카> 강독은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참여자가 처음보다 더 늘었다. 이는 시작한 지 2년 반이나 된 서양 고전철학 읽기도 마찬가지다. 이제 반년을 겨우 넘긴 정도지만 근대철학 고전읽기나 칸트 강독도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재미있는 것은 공부를 함께하는 이들이 연령과 직업을 넘어 많은 것을 나누는 지기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엊그제 공동체에서 1년여 밥상을 함께하며 공부하던 한 청년이 취직해서 이곳을 떠났다. 손바닥을 마주치며 헤어질 땐 가슴이 텅 비는 듯했지만 나는 그가 영영 떠난 것이 아님을 안다.

열심히 일하다 공부 갈증을 느끼면 언제든 다시 공동체를 찾을 것이다. 우리의 공부는 주로 책을 매개로 하지만, 인생의 어떤 순간에만 반짝하다 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걸쳐 지식과 기술, 경험과 우정을 나누며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공부다. 우리의 공부는 삶과 삶터를 의미있고 풍성하게 하려는, 평생에 걸친 즐거운 수행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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