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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一刻)이라도 빨리 대통령직 수행을 정지시켜야 한다. 이대로 두면 너무 위험하다. 보수·진보를 가릴 것 없이 온 국민이 거의 일치된 목소리로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물러가라고, 주권자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이 상황에서 고위공직자들을 새로이 임명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조약까지 맺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국가·국민의 운명을 파탄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이와 같은 짓들을 계속해서 저지를 게 아닌가?

이 나라가 지난 수년간, 선출된 공적 권력이 아니라 사실상 최아무개라는 사인(私人)에 의해 지배돼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대한민국 국회는 즉각 대통령의 직무 정지에 착수해야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화국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정치가라면 100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 마땅히 탄핵 절차를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회가 아무리 ‘공공심을 결여한 인간들(idiotes)’의 집합체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의 일은 명색 국민의 대표로서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였다. 그런데도 야당 의원들조차 한없이 꾸물거리더니 이제야 비로소 탄핵절차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대체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야당이 우려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현재의 국회 의석으로 볼 때 여당 의원들의 상당수가 동의해야 탄핵안이 가결된다. 또,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헌법재판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지만, 그 대통령의 충직한 머슴으로 지내온 현 국무총리가 당분간 국가를 운영하는 책임자의 지위를 맡게 된다.” 이러한 우려는 일면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일단 발의된 탄핵안은 성사돼야 하고, 임시적으로나마 행정부를 관리할 인물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합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긴급한 것인가를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 수행을 즉시 정지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우려사항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그때 가서 대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국회가, 좀 더 좁혀 말하면, 야당 정치인들이 과연 자기들에게 맡겨진 이 중대한 역사적 책무를 감당할 능력과 용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 이 문제가 자신들이 떠맡아야 할 역사적 책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박근혜라는 인물이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 자체가 그 자신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재앙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 말고는 책임 있는 정치가로서 아무런 자질도, 능력도 보여준 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공과 사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위인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정수장학회나 영남대학교를 자신이 상속받은 개인 재산으로 간주해온 것은 그가 공민의식을 완전히 결여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였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는 박정희가 사망한 직후 1980년 봄에 영남대 교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그 이전에 재직하던 학교를 떠나 영남대로 옮긴 이유 중에는 매우 순진한 기대가 있었다. 즉 1960년대 중반에 박정희 정권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라는 (대구·경북지역의 유지들이 해방 직후 설립한) 두 명문 사학을 거의 강제적으로 통합하여 설립한 이 대학이 이제 독재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원래의 민립대학의 지위를 회복할지 모른다, 그러면 영남대는 ‘주인’ 없는 대학이 되어 한국 사회에서는 드물게 대학자치의 모범을 보여줄지 모른다, 라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곧 깨지고 말았지만, 그 와중에 동료들과 내가 가장 의아스럽게 생각한 것은 박근혜가 대학의 새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영남대는 박정희가 독재권력을 가지고 남의 재산을 강취(强取)하여 만든 학교였으나,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5·16재단이라는 공익재단에 귀속돼 있었다. 그런데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하자 그 딸이 이 학교를 마치 자기 부친이 물려준 정당한 사유재산인 양 상속을 해버린 것이다. 공과 사의 구별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는 이 너무도 뻔뻔스러운 처사에 우리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지만, 무도한 군사정권의 지배하에서 우리는 침묵하고, 굴종의 세월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꼽아보니 그로부터 35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새삼 우리가 놀라는 것은, 실은 이 나라의 정치판과 언론계에서는 박근혜라는 개인이 정치가로 등장할 때부터 그가 공직자로서는 매우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제도가 갖는 허점을 타서 승승장구한 끝에 드디어 대통령이라는 지위까지 상속을 하였고, 그 결과 나라는 철저히 망가져버렸다. 그러니까 박근혜 개인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방치하거나 방조해온 자들이 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자들에는 어용언론과 여당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소위 야당 정치가들도 포함돼 있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로 나와, 너나없이 새로운 나라,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운동이 정당한 결실을 거두자면, 지혜롭고 용기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역할이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신 ‘들사람의 얼’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 정치판에서는 왜 좀처럼 보이지 않을까? 계산에만 열중할 뿐 자기희생을 모르는 좀비들 이외에 왜 ‘큰 인간’이 없을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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