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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황당하다고 해야 하나? 국회에 나와서 임기 내에 개헌을 주도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할 때만 하더라도 독선적인 표정이 역력했는데, 바로 이튿날 “국민들께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사과한다면서도 빤한 거짓말을 몇 마디 하고는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하는 것을 보고 그걸 진솔한 사과라고 받아들일 ‘국민’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늘 자기만 옳다는 독선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권력자가 저렇게 힘이 빠진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낯선, 결코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생각할수록 기괴스럽다. 국정원의 개입 덕분이든 뭐든 박근혜 정부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정권의 막후에서 국가운영을 사실상 조종하고 좌우해온 실질적인 권력은 최아무개라는 개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몇 년간 박근혜 정권이라고 생각했던 정부는 실제로는 허깨비에 불과했고, 실상은 최아무개 정권이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누구도 모르고, 아무도 그 권력행사를 위임해준 바 없는 일개 사인(私人)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배를 받고, 통치를 당해왔다는 게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각종 연설문과 발언자료 등을 유출한 것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어떤 학자들은 그동안 한국의 대통령제를 규정하여, 삼무(三無) 대통령제라고 말해왔다. 즉 무책임, 무반응, 무소불위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일에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국가를 운영하는 습성에 길들여진 최고 권력자의 제왕적 통치방식을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즉 ‘무개념’을 추가하여 ‘사무(四無) 대통령제’라고 불러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는 데만 급급할 뿐, 국가란 무엇인지, 공과 사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지, 대통령직이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도 없는 인물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에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지금 통절하게 경험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에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가장 가깝게는 농민 백남기의 죽음을 둘러싼 국가권력의 불가사의한 패륜행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백남기 그분이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고 뇌가 망가져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 공권력은 굳이 부검을 하여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겠다면서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유족의 마음을 갈가리 찢고, 수많은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검찰과 경찰이 부검을 하겠다는 것은 무슨 수로든 사망의 원인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얼버무리겠다는 속임수라는 것은 누가 봐도 빤하다.

그런데도, 공권력의 정당한 행사라는 형식논리를 들이대며, 이 무도하고 파렴치한 작태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리 썩을 대로 썩었다는 대한민국 공권력이라고 하지만 자기들도 인간인데 이렇게까지 반인륜적인 폭거를 행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세월호 문제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사회에 만연한 돈밖에 모르는 풍조, 부실하기 짝이 없는 관리·감독체계,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공적 책임의식의 철저한 붕괴 등등으로, 어차피 사고는 났고, 수많은 아까운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국가는 마땅히 사고의 원인을 규명·조사하는 데 적극 나서거나 협력해야 했다. 그래서 국가 자신의 책임이 막중한 만큼 공정한 조사가 되기 어렵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여 민간 특별조사기구에 의한 진상조사를 적극 돕고 성실히 뒷받침해야 마땅했다. 법률적 형식논리를 따지기 전에, 그것이야말로 국가라는 공동체가 계속 존립하려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행위라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보아온 대로, 이 정권은 진상조사를 돕기는커녕 끊임없이 방해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시한마저 자의적으로 정한 뒤, 결국 조사활동 자체를 강제로 종료시켜 버렸다. 사고 이후 2년이 더 넘었는데도, 그리고 지금도 광화문에서는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피눈물로 호소하며 농성 중인데도, 국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월호’는 아직도 미스터리 속에 싸여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언제 해소될지 기약이 없다. 현대국가 가운데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국가권력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이토록 반인륜적인 작태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개성공단 폐쇄도, 사드 배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에게 남북 문제는 힘들고 고달프지만 어쨌든 조심스럽게 관리하여 평화를 유지하면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도모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업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자면 우리 사회의 최량의 지혜를 발굴·결집하여 최대한의 합리성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오랫동안의 인내와 용기와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공단을 이 정권은 하루아침에 폐쇄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가까스로 남아 있던 남북 간 교류의 마지막 통로가 닫혀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모한 결정이 납득은 안되지만, 어쨌든 국가 최고 권부에서 내린 결정인 만큼 거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의와 숙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아무개라는 이가 국가 중대사를 좌지우지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개성공단 폐쇄 결정에도 그의 개입이 있지 않았을까, 모골이 송연하지만,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정말 짚어야 할 게 있다. 국가운영이 이토록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사람들, 그리고 집권당 고위 인사들이라는 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직언은커녕 그저 어린애들처럼 고분고분 순종만 하면서 국록(國祿)만 축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이는 이번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에 국회에서 ‘봉건시대라면 모를까 운운’하며 최아무개라는 숨은 권력자의 권력행사를 부정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진상은 오늘의 대한민국 최고 권부는 옛 왕조시대보다 훨씬 더 질 낮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자들의 소굴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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