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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해자는 미발표 근작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 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앞장서서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실로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과 시골에서 온 할머니,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가 표출되고 있는 이런 장면 앞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이제 더는 다수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장면에 비해서 한결 더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결정의 주체는 민중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지금 광장에서 울려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문제, 노동탄압, 인권 및 환경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탄핵문제에 집중돼 있으며 그와 동시에 재벌문제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정치뿐만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 학계, 사법부, 그리고 검찰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아이들까지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2016년 겨울, 우리의 최대 과제는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시위나 봉기는 결국 일시적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법을 만들어 민중의 민주적 열망이 지속적인 생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도와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시민의회’든 ‘시민주권회의’를 통해서든 ‘시민권력’의 힘으로 나라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지금 광장을 밝히는 촛불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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