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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탄핵이 될 것임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정미 재판관이 “그러나 (세월호 사태가) 참혹한 것이긴 하나 탄핵 사유까지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불안해졌다. 하지만 잠시 후, 이 역사적인 판결의 결론은 ‘피청구인(대통령)의 파면’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몰상식이 활개치는 사회에서 살아온 탓일까.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결론인데도 이 결론을 듣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크나큰 해방감을 느꼈다.

지난 몇 달동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열심히 광장으로 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몸은 못 나갔어도 마음만은 촛불을 든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느낀 감정도 기본적으로는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책임하고 개념 없는 대통령 하나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오랫동안 옥죄어온 거짓과 위선, 불의와 부패의 사슬들을 걷어내고 이제는 인간답게, 정말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때문에 이토록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닌가?

더욱이 헌법재판소의 결론은 기대 이상으로 명쾌했다. 즉, 피청구인을 파면하는 핵심적인 사유는 그가 헌법을 위배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최고위 공직자로서) 헌법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퇴임식에 참석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있다. 김창길 기자

학자들에 의하면, 나라의 정체(政體)를 ‘민주공화국’으로 천명하고 헌법 제1조에 명기하고 있는 우리의 헌법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헌법이다. 1948년의 제헌헌법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조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만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보존돼왔다. 그런 점에서 제1조야말로 우리 헌법의 핵심인 셈이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이 헌법은 (무지한 젊은 시절의 내가 생각했듯이) 해방 후 몇몇 전문가들이 외국의 헌법을 베껴서 급조한 게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현행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상해 임시정부가 작성한 헌법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임시정부의 헌법 정신은 또한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품었던 이상과 비전을 계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재판받을 때 관헌과 주고받은 문답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대가 경성으로 쳐들어온 뒤 누구를 추대할 작정이었나?” “일본군을 물리치고 간악한 관리들을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 주춧돌처럼 믿음직한 선비들을 내세워 정치를 맡게 하고 나는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사를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에 여러 사람들이 협의하고 화합하는 합의법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도쿄아사히신문’ 1895·3·6) 요컨대 전봉준 장군이 구상한 것은 공화주의 정치원리였다(기본적으로 유생이었음에도 전봉준 장군이 공화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를 구상했던 배경에는 만민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동학사상이 있었다).

공화주의 원리란, 간단히 말하면,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사유물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평등한 자격으로 고르게 지분을 나눠 갖는 공유재산(commonwealth)이라는 전제 위에 서있는 정치원리이다. 우리들 중에는 이러한 정치사상이 해방 후 이 땅을 점령 통치하기 시작했던 미국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있다. 하지만 그 오해는 역사에 대한 완전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좀 더 깊이 역사를 들여다보면, 공화주의(혹은 민주주의)의 원리는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늘 (세계의 어떤 지역, 어떤 민족에 못지않게) 한반도 주민들의 의식과 욕망을 근원적으로 지배해온 토착적인 생활윤리였다. 그러므로 공화주의의 첫째 원칙, 즉 평등주의 사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매우 민감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장 큰 불행을 느끼는 것은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과 욕망이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좌절될 때였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에서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절대적인 빈곤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갈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에, 또한 이것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국가의 공공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아득한 절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누구보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정으로 인해 그동안 사실상 사문화되었던 헌법 제1조, 즉 민주적 공화주의의 원칙이 다시 국가운영과 정치의 중심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확고히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고 가장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친 구호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였다. 실제로 우리 헌법 제1조는 이번 시민혁명에서 사람들이 사용한 유일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헌법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헌재는 이 지극히 온당한 요구를 헌법적 판단이라는 형식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헌재가 헌법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뜻에 맞는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토록 흥분하고 세계도 놀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따져보면 헌재까지 포함하는)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의 철옹성 같은 지배구조에 큰 균열이 생겼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사람들이 구호만 외친다고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다수가 ‘공적 개인’이 되어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능동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민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모처럼 발휘된 이 시민권력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차적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기존의 실패한 대의제 정당정치를 그대로 방치한 채 우리는 물러나야 할 것인가? 파면당한 대통령과 공범임이 틀림없는 국회에, 그리고 이 역사적 순간에 대연정이니 화해니 타협을 운위하는 나약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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