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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권은 그냥 주기적인 선거가 아니라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로 어둠을 밝히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절규했던 시민들의 궐기로 세워졌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권은 지금 승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그들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압도적인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국가운영에 반영할지 깊게 고뇌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만약 새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고 가정할 때, 산적한 난제를 어떻게 풀지 엄두가 날까? 군사정권이나 역대의 퇴영적 정권이라면 매우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즉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폭력으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의 힘으로 출범한 ‘민주정부’가 그런 비열한 통치방식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현명한 방책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문재인 정권의 성공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 특히 오늘의 청년세대와 아이들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헬조선’은 적어도 100년 이상의 해묵은 비리와 부조리가 누적된 결과라고 한다면, 단숨에 개혁 혹은 격파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권과 언론에서 왜 ‘협치’니 ‘통합’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들의 논리는 일견 합리적이다. 현재의 국회 구성상 새 정권은 어차피 야당들의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타협을 해야 하고, 그럴 바에는 ‘공동정부’를 구성하여 ‘국민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럴싸한 논리의 배후에는 다분히 정략적인 계산이 깔려있음을 간과해서 안된다. 돌이켜 보면, 선례도 없지 않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 당시의 기득권층 인사들이 강조하던 게 바로 ‘국민통합’과 ‘타협’이었다. 그러니까 시대를 넘어서 그들이 ‘통합’과 ‘협력’을 역설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비행이나 역사적 과오를 문제 삼지 말아달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재인 정권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난국을 헤쳐 나가려면 어쩔 수 없다면서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어온 장본인들과 끝내 손잡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필경은,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좋은 의도가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는 정치적 실패를 자초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특히 주류 (사이비) 언론들은 세대 간의 갈등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온갖 사회적 비극과 부조리는 근본적으로 부의 편중,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사회적, 환경적, 실존적 재난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합리적 정치의 부재, 즉 공공성을 상실하고 극소수 기득권층의 사익을 돕는 수단으로 타락해버린 국가권력의 오용 내지 남용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다운 정치의 회복, 즉 민주정치의 실천만큼 더 긴급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를 동반하지 않는 민주정치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다.

하기는 ‘헬조선’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인간사회의 핵심 문제는 소득과 재산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었다.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라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몽상이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할 때,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자유로운 삶’이 허용될 리는 없다. 나아가 그 사회는 국가폭력 없이는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야만적인 사회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부자든 빈자든 공멸을 면할 수 없는 파국임을 역사는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럼에도 부유층이나 기득권세력은 결코 양보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한 사상가가 <로마사 논고>의 저자 마키아벨리이다.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이야말로 다수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유일한 체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화정의 최대 걸림돌은 부의 균점을 완강히 거부하는 부유층의 탐욕이다. 마키아벨리는 부의 과도한 격차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의 격차를 가져오고, 그리 되면 귀족과 평민의 평등한 참정권을 전제로 하는 공화정은 존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부의 완전한 균등화나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친 경제적 격차, 그로 인한 권력의 독점과 공권력의 오용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교적 안정된 공화주의체제 속에서 평민들이 자유롭게 살았던 역사적 선례의 하나로 게르만족의 공동체를 언급하며, 그 공동체에서는 만약 부자들이 위세를 부리면 “그냥 죽여버렸다”고 말한다.

정의를 위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오늘의 상황에서 용인될 수 없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는 ‘평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단호함을 문재인 정권에 기대할 수 있을까?

결국 중요한 것은 지혜와 용기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지, 가장 귀를 열고 응답해야 할 상대가 직업정치인도 기득권층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는다면, 길은 뜻밖에 쉽게 열릴지 모른다. 당장 새 정부가 대응해야 할 사드 배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과 의논도, 국민의 동의도 없이 날치기로 진행되고 있는 게 이 문제의 본질임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해결책은 찾을 수 있다. 즉 사드 문제를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으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국민들의 뜻을 직접 물으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회의체를 만들어 거기서 치열한 논쟁과 숙의를 거쳐 내린 결정을 가지고 미국이든 중국이든 상대방에 떳떳하게 설명하면 될 게 아닌가?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대통령 맘대로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친절한’ 부연설명을 곁들여서 말이다.

※ 이 글로써 당분간 작별합니다. 그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향신문에 감사드립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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