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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에메랄드빛 물이 장미와 인동덩굴들로 둘러싸인 바위들에 부드럽게 부딪히며 찰싹거리거나 자갈들이 깔린 강변과 흰 모래톱 위로 굽이치며 흘러가고 있다.”

이것은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8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들> 속에서 묘사한 남한강 상류의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세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남한강뿐만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큰 강들은 곳곳에서 댐과 콘크리트 시설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로막히면서 강다운 모습을 계속 상실해왔다. 여기에 결정타를 입힌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명박 정부가 강행한 소위 ‘4대강 사업’이다.

강을 정비한다며 모래톱과 강바닥을 분별없이 파헤치고, 옥답 중의 옥답인 강변 둔치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고, 대규모 댐들로 곳곳에서 강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강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너무도 명백한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온갖 말도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며 정부는 어용언론과 어용학자들로부터 적극적 혹은 소극적 지지를 받아내면서 공사를 강행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된 경남 창녕군 부곡면 노리마을 앞 낙동강 습지 (출처 : 경향DB)

낙동강을 비롯하여 우리의 강들은 더 이상 강이라 할 수도 없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대한 호소와 수로로 변하고 만 것이다. 수량은 풍부해졌는지 모르지만, 썩은 물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생각하면 정말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나는 ‘4대강 사업’의 결과를 단지 환경파괴나 국가재정상의 ‘비용 문제’로 보는 -현재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은 매우 미흡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악화되었다거나 내륙 수변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거나, 혹은 국가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다거나 하는 그런 공리적이고 가시적인 손실이 아니다. 핵심적인 사태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자연스러운’ 강이 없는 나라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지금부터 강이라고 하면 거대한 수로와 댐과 콘크리트 시설물 외에 아무것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 삭막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9세기 말에 조선을 찾았을 때 그의 눈에 먼저 뜨인 것은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조선의 평민들이 매우 맑고 소박한 심성의 소유자들임을 주목하였다. (버드 비숍 역시 당시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다른 서양인들처럼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그것은 아직 자본주의적 노동규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던 민중의 생활태도에 대한 서구인의 미숙한 편견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버드 비숍의 생각에, 조선 사람들의 이러한 심성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 사람들의 후손이건만 우리들은 지금 경황없이 우리의 모든 정력을 천박하고 야비한 물질적 욕망의 경쟁적 추구에 쏟아부으면서 분주한 나날을 지내고 있다. 가끔이나마 유유히 흘러가는 강과 먼 산을 바라보며 인생과 우주의 의미와 그 신비에 대해 명상하는 습관은 우리의 생활로부터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예전엔 고기를 낚는 것보다 낚시터의 ‘적막’에 마음을 뺏긴 낚시꾼이 많았다. 이제는 그러한 것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제 거의 예외 없이 ‘고향을 잃은 자’들이 되었다. 실제로 고향땅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경제성장과 개발과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에 의해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고향 상실을 ‘계산적 사고’의 압도적인 득세로 말미암아 사색의 습관과 능력이 쇠퇴한 탓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색이란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묻는다. “오늘날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거주지에 고요히 사색할 수 있는 장소가 남아 있는가?” 하이데거는 제3차 세계대전보다 더 무섭고 우려해야 할 것은 “생명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술적 침략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이 ‘침략’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사색이 결여된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그저 ‘안락’과 ‘안전’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최소한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인간다운 인간의 존립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고요히 사색할 수 있는” 능력과 장소를 허용하는 문화가 살아있어야 하고, 정치도 마땅히 그 방향으로 겨냥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롯하여 역대 정권의 실정은 단지 국가재정을 거덜내고 환경을 파괴해왔다는 점에 그치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의 엄청난 죄악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새만금 개발을 내세워 천혜의 갯벌을 대대적으로 망가뜨리고, 우리들 모두의 영속적 삶을 위한 가장 소중한 기반인 농사를 끊임없이 홀대해온 역대 정권과 권력엘리트들의 과오도 결코 작은 게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과오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정책방향이 결국 ‘배부른 돼지들’의 세상을 지향한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의 생활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가난’을 저주하고 증오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일념으로 추구해온 것이 결국은 공허한 물질적 안락이었다는 데 핵심적 비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뜻밖에도 우리의 삶이 전혀 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간다운 삶의 근본기반이 망실돼 버렸음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이 극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4대강 사업’의 재앙과 ‘세월호 참사’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개의 사태 사이에는 내면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사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공적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근원적으로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사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으려면 ‘사색’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인간들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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