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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11일, 미증유의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가 초토화되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이재민이 생겨난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4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재해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세월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수습이 되고 아물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날 동시에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이다. 4년이 경과했지만, 사고를 온전히 수습할 수 있는 대책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방사능은 기약 없이 방출되고, 대기와 해양은 끝없이 오염되고 있다.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미 북미지역도 후쿠시마 사고의 심각한 피해지역이 되었다. 북미지역의 유아사망률이 현저히 높아졌다는 통계는 하나의 지표이다. 이대로 가면 결국 태평양도 생명에 치명적인 생태적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후쿠시마 사고현장 인근 거주지를 떠난 20만 이상의 피난민은 언제 귀향할 수 있을까? 아니, 귀향이 가능한 날이 올까? 이미 귀향을 아예 단념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삶터가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을 다들(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지금 후쿠시마현 곳곳에는 소위 제염작업을 통해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걷어내 담아둔 포대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이 포대들을 처분할 방법은 있는가? 중요한 것은, 방사능 사고에 관한 한, 제염을 통한 원상복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고가 나기 전의 후쿠시마 땅은 가장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토지였고, 그 해안은 풍부한 수산자원의 보고였다. 하지만 인류의 공통자산이기도 한 이 모든 ‘보물’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

원자력 재해란 본질적으로 속수무책인데다가 또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그 경험이 없었던 게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1986년의 체르노빌 참사였다. 체르노빌 참사는 “사고였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 30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고이다. 아마 영구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2012년에 체르노빌을 다녀온 일본 NHK 프로듀서들의 취재기록에 의하면, 체르노빌에서 140㎞나 떨어진 마을의 13∼14세 학생들 중에서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18명 중에서 4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창 원기왕성할 때인데도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병든 늙은이들처럼 걸핏하면 쓰러져 하루에도 몇 차례나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된 것은 대를 이어 계속되는 방사능의 유전적인 영향 이외에 방사능에 의해 오염된 토지에서 기른 작물을 먹고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종식되려면 방사능의 독성이 사라지는 수백, 수천, 수만년을 기다려야 한다.

통탄스러운 것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엄청난 참사를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일본정부와 권력자들은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국민의 압도적인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원전 재가동과 원자력산업의 해외수출이라는 기왕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마치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사태가 없었다는 듯이, 설계수명이 끝난 원전의 연장 가동을 ‘용감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정부도 마찬가지다. 대체 무엇을 보고 배운다는 ‘학습개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후쿠시마 사고 4주년에 때맞춰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독일이 그랬듯이 일본도 과거 역사를 솔직히 정리·반성하지 않으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원전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에너지시스템이라고 명쾌히 지적했다. 실제로, 일본(한국도 마찬가지지만)이라는 국가의 근본문제는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일본지배층은 태평양전쟁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서도 이것을 ‘패전’이라고 하지 않고 ‘종전’이라고 불러왔고, 그럼으로써 식민지지배와 전쟁책임을 묻는 역사적 과제를 회피해왔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얼버무리려는 이 정신적 도피주의는 후쿠시마 사태에 대해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국제사회를 향해 “후쿠시마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 후쿠시마 사태 수습이라는 난제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무책임성과 비겁함에서도 그것은 드러났지만(방사능에 오염된 땅 도쿄에서 과연 올림픽이 성사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무엇보다 온 세계에 피해를 끼치고도 원자력시스템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그들의 완미(頑迷)한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은 오늘날 경제력과는 관계없이, 가령 독일에 비해서, 매우 질 낮은 국가, 퇴행적 국가의 모습을 국제사회를 향해 부끄럼도 없이 드러내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4주년인 11일 일본 미야기현 나토리시에서 두 자매가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옛 집터를 찾아가 당시 사망한 부모를 추모하고 있다. 이날 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현 등 피해가 컸던 지역을 비롯해 일본 곳곳에서 대규모 추모 행사가 열렸다. _ AP연합


이러한 퇴행을 자초한 책임은 물론 권력엘리트들에게 있다. 흔히 지적하듯이,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후 줄곧 관료 주도 전제정치였고, 국가의 중대사는 항상 권력엘리트들이 독점적으로 결정해왔다. 국민의 뜻과 우연히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력엘리트들이 국민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요컨대 민주주의 원칙의 거부가 일본 및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 확대되는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끝난 월성 1호기 원전 연장 가동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의견들을 무시하고 연장 가동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원안위’ 위원장은 연장 가동을 반대해온 사람들을 ‘외부세력’으로 지칭하고, “기술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는 현실”을 비난했다. 이 주제넘은 발언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혹은 몰이해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원전의 건설이나 운영에 관한 ‘노하우’는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원전 자체의 사회적 용인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민과 시민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대원칙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이 한심한 상황을 이대로 두면, 앞날이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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