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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지만, 민병산 선생(1928~1990)은 한때 이 나라의 상당수 양심적인 지식인·예술가들의 친근한 벗이자 스승으로서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가신 분이다. 그분은 아무런 재산도, 일정한 직장도 없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무욕의 현자이자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독서인이었다. 그분은 번역이나 좋아하는 바둑의 해설을 쓰거나 수필을 써서 생계를 영위했고, 생애 말년에는 고서화와 지필묵의 거리(인사동)를 거닐며 자신이 쓴 붓글씨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다가 가셨다. 한마디로 자유인이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분의 면모는, 생활에서든 말과 글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내세우거나 공격적인 자기주장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분과 가까이 지낸 이들 중에는 민병산을 ‘식물적 인간’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무골호인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선생은 습관적으로 대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분이었지만, 간간이 특유의 해박한 지식으로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원래 ‘식물적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의 죽마고우인 신동문 시인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선생은 일제강점기 충청도 제일의 갑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귀공자’로 자랐고, 보성중학교 학생이었을 때는 럭비선수로도 활약한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기는 10대 후반 학우들과 함께 조직한 ‘독서회’가 불온단체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그래서 동료 학우들과 옥살이를 하다가 10개월 만에 풀려나왔는데, 막상 나와 보니 자기만 풀려나온 것이다. 갑부 집안의 권세로 총독부에 로비를 한 결과인 것을 알게 된 청년 민병산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말없이 칩거에 들어갔다. 선생의 지인들은 그 충격 때문에 그가 칩거생활에 들어가 오로지 독서에 열중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몇 년간의 칩거 후 세상에 나타났을 때 민병산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얼굴부터 달라져 있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였으나 연로(年老)한 현자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민병산 선생의 죽마고우인 신동문 시인 (출처 : 경향DB)


이것도 친지들에 의해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민병산은 그 후 조부가 돌아가신 뒤 응당 장손으로서 물려받아야 할 재산상속을 일체 포기하고,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막대한 상속을 포기한다는 것,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물론 범인(凡人)이 함부로 논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무소유의 실천이란 ‘인류의 교사’로 추앙받은 톨스토이조차도 결행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50대 이후 톨스토이의 정신을 사로잡은 것은 복음서의 가르침이었다. 톨스토이에게 그 가르침은 단순했다. 즉 헐벗고 가난한 자가 복을 받으리라는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팔순이 지나 사망 직전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결행할 수 있었다. 수십년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무소유의 삶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는 내면적 갈등과 투쟁을 거친 다음에야 마침내 결행한 것이 그때였던 것이다. 톨스토이와 같은 예외적으로 비범한 정신력과 강골(强骨)의 소유자가 말이다! 그런데 민병산은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벌써 20대 청년시절에 결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의 그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이미 민병산의 생애는 ‘자유인’의 그것일 수밖에 없도록 돼 있었다.

오늘날 세상에는 무소유라는 말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종교인, 혹은 민중의 ‘멘토’라고 불리거나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그런 인물들이 꽤 있다. 그러나 진짜 무소유란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적 명예, 그리고 온갖 권력 욕망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있는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이 민병산 선생을 ‘식물적 인간’이라고 부른 것은 그분이야말로 늘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소유란 진정한 자유로움의 근본조건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특징은 그가 사심이 없고, 생각이 크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뒤 후배들이 편찬한 민병산 문집 <철학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면, 비록 지금으로서는 낡은 토픽이 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글 자체는 가식 없이 자연스럽고, 엄정하면서도 소박한 문체 속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에는 어떠한 개인적 고뇌, 자기연민, 혹은 자기주장의 목소리는 흔적조차도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철저히 사심을 초월한 ‘시민적 관심’의 일관된 표출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무욕의 현자가 지니고 있던 궁극적 관심사는 결코 은둔자로서의 삶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민병산이 지향한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그러나 자율적인 시민으로서의 열려진 삶이었다.

선생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짧은 일화가 하나 있다. 언젠가 그가 동네 길을 나오다가 돌담에 널찍한 광고가 붙어 있어서 그걸 보려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도 그걸 보려고 걸음을 멈췄다. 어른이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한 아이가 선뜻 “아저씨, 이건 새로 생긴 버스노선을 안내하는 광고예요”라고 말했다. “버스가 하나 더 생겼단 말이니?” “예, 오늘부터 혜화동, 종로5가, 퇴계로, 서울역으로 돌아서 온대요. 여기 그림으로 표시가 돼 있어요. 보세요.” “음, 정말 그렇구나. 아저씨는 편리해져서 좋구나. 너는 어떠냐?” “전 뭐 날마다 버스를 타나요. 학교가 바로 여긴데. 그럼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몇 해가 지난 뒤에도 이 장면이 자주 생각난다고 민병산은 썼다. 그러면서 그는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자유시민’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는 “전제정치하의 페르시아인들의 자세는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그리스 자유시민들은 자세가 반듯했다”는 고대 역사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민병산의 꿈은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존엄한 ‘시민’으로 사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어깨가 처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교육이라는 이름의 ‘지옥’과 ‘스마트폰’ 속에 갇혀 완전히 자폐적인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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