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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들은 대체로 돈 계산이나 그런 걸 위한 서류 작성과는 참 거리가 먼 족속이다. 수년 전 어린이 문학 작가들이 내는 월간지 ‘어린이와 문학’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무려 2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첫해는 존경과 찬탄을 한 몸에 받는 능력자가 있어서 이게 ‘어린이와 문학’에 내린 하늘의 은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다음 해 무슨 이유인가 우리 사회 평균 수준의 돈 계산 능력을 갖춘 능력자가 빠져나가자 졸지에 하늘의 은총이 재앙으로 돌변했다. 요구하는 은행거래와 서류와 영수증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 일에는 무지몽매하기 그지없는 글쟁이들이 1년 내내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글쟁이들은 절대 정부 지원은 받지 말고 차라리 주머니를 털어서 적자를 메꾸자는 결정을 거의 만장일치로 내리고 정부 복식부기 회계의 압제에서 해방된 기념으로 거하게 한잔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나 역시 무지몽매한 글쟁이 중 하나라 처음 세무서에서 사업자이고 복식부기로 장부를 만들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 확인 전화를 여러번 했었다. 저 가게 같은 거 하는 사업자 아닌데 잘못 연락하신 거죠? 회사도 아니고 받는 건 책 인세밖에 없어서 무슨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같은 거 만들 거리가 애초에 없는데요? 골치 썩이기 싫어서 신고를 안 했더니 추징 세금 300만~400만원에 벌금 100만원이 나왔다. 이렇게 정부 지원금을 타먹는 일이 어렵고, 우리나라 세무서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며칠 전 유아교육 전문가가 나한테 와서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사립유치원들은 복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하지 않고 단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할 수 있도록 법률에서 예외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개정을 해서 이 조항을 바꾸지 않으면 에듀파인 같은 국가 회계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식부기는 말하자면 현금출납부만 작성하는 것이어서 그걸 가지고는 재무상태도 파악하기 어렵고, 회계부정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글쟁이들에게서도 고문에 가까운 복식부기 회계 규정을 들이대 주머니 동전까지 꺼내가는 실력자들이 어떻게 적어도 매출 10억원은 되고 정부 지원도 1억원 내외는 받을 사립유치원에 현금출납부만 기록하면 되도록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거의 부정을 저지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해준 꼴인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거의 무소불위의 신적 능력이 필요했을 텐데?     

사립유치원들이 회계감사와 국가 회계시스템 에듀파인 적용 방침에 반발하여 학부모들에게 폐원을 통보하는 일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짜 폐원을 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되지만 폐원을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안된다고 연합회 간부가 총회에서 권장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유아와 학부모에게 겁주는 행위를 당당하게 하는 배후에는 유치원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관점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교육수요자가 있어서 교육공급자가 생긴 거고, 교육공급자는 원하는 수익이 생기지 않으면 수요자가 있어도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건데 웬 간섭이냐는 투다. 이런 점에선 근래 20여년간 형성된 사회 교육적 흐름이 사립유치원 사태를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다.

언제부턴가 학교교육을 이야기할 때 교육수요자와 교육공급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영삼 정부 5·31 교육개혁 이후부터일 것이다. 물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와 교육기관이 절대적 갑이었던 군사정권 시절에 비하면 학생·학부모의 학교 교육에서의 지위를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개념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육의 주권자인 국민을 졸지에 공교육의 수요자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또 교육 주권자인 국민과 공적 봉사자인 국가기구 위에 이 모두를 규정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시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공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원산지인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토론회에서 한 교육 전문가가 미국의 수월성 교육은 하버드, 스탠퍼드 같은 사립학교가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이사회가 있다고 해서 하버드, 스탠퍼드를 사립학교로 보면 안돼. 그 대학들은 그 출발에서 보면 카운티 주민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건립한 국공립학교야. 미국의 학교 대부분이 그래. 그래서 카운티의 경제 사정에 따라 교육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어.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점을 알면서도 감수해. 왜냐하면 카운티의 주민들이 학교를 건립한 주권행위가 공교육의 중심을 지키는 가장 신성한 가치이기 때문이지. 이런 신성한 가치가 없다면 그건 공교육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지.”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계를 투명하게 하는 등 기능적인 개선을 하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을, 국민을 공교육을 건립한 주권자로서, 그 주권행위를 신성한 가치로서 교육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지역주민이, 국민이 을인 수요자로 인질이 되는 곳에는 어떠한 상상적 공동체도, 국가도, 공교육도 없는 것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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