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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의 변천만큼 우리 사회변동을 잘 상징하는 것은 없다. 압축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선 국민 동원이 중요했고, 그 동원의 목표는 표어로 집약됐다.

표어의 변천에서 극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게 인구정책이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에서 볼 수 있듯 산업화 시대에는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이 추진됐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선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입니다’라는 표어가 보여주듯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이 펼쳐졌다. 표어의 변천을 낳은 것은 당연히 출산율의 변동이다. 합계출산율이 1960년에 6.0명이었지만 지난해에는 1.17명을 기록했다. 세계에서 출산율 증감이 이렇게 극적인 나라는 없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2차 세계대전 직후 4.5명 전후였던 합계출산율이 지난해에 1.44명으로 감소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에 100만명에 달했던 신생아 수가 올해 36만명으로 줄어든다고 하니 가장 빨리 인구폭발에서 인구절벽으로 가는 국가인 셈이다.

인구절벽이란 생산가능인구(15∼64세) 비율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현상을 지칭한다. 인구절벽이 심각한 문제인 까닭은 그것이 가져올 연쇄 작용에 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소비 및 투자 위축을 낳고, 이는 제로성장 또는 마이너스성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저출산이 결국 우리 미래를 벼랑 아래로 내몰 수 있다는 점에서 인구절벽 대책은 정권을 넘어선 국가적 의제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저출산 정책이 꾸준히 추진돼 왔음에도 별반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 10년간 100조원에 가까운 정부 예산을 투입했지만 출산율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왜일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책결정권자인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출산 가능 세대인 에코붐 세대(1980~1990년생)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코붐 세대에게 출산은 자유로운 선택이지 당연한 의무가 아니다. 정부가 출산장려금과 양육수당을 제공한다고 해서 이들이 출산을 곧 결심하지는 않는다. 한 경험적 연구에 따르면, 출산율 증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고용률, 혼인율, 땅값변동률 등의 환경적 변수들이다. 고용률과 혼인율이 올라가면 출산율도 증가한다. 구직과 결혼이 쉬워져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저출산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다. 출산을 결심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나와 아이의 행복이다. 청년실업, 비정규직, 구조조정 등으로 내 삶이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겐 출산에 앞서 결혼이 쉽지 않은 숙제다. 설령 결혼하더라도 아이가 나처럼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경쟁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출산을 선뜻 결정하기도 어렵다. 아이를 갖는다는 게 기쁨이 돼야지 부담이 돼서는 안된다. 요컨대 저출산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젊은이들이 스스로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 자조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연애와 결혼을 자유롭게 해야 출산을 결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인구절벽 해소를 4대 복합혁신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 인구절벽 대책은 자녀출생·양육·교육의 국가책임 구현, 결혼·출산을 꿈꿀 수 있는 성평등 사회로의 전환, 컨트롤타워로서의 저출산·고령화위원회의 강화가 주요 내용을 이룬다.

특히 안정된 청년 일자리 창출, 주거 공공성 강화, 일과 가정의 양립, 성평등 문화 정착, 자녀와 부모 모두 행복한 교육의 5대 개혁 의제에는 포괄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한 고심이 담겨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출산 원인이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만큼 그 대응 또한 다각적이며 근본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동수당 도입, 공보육 강화, 배우자 출산휴가 확대 등의 직접적인 대책도 중요하고, 고용·교육·주거·노후의 4대 불안 해소 등과 같은 구조적인 정책도 중요하다. 좀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이민정책 또한 검토해 봄직하다. 저출산 해결을 위해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엄마와 아빠가 함께한다는 성평등 문화의 정착이다. 스웨덴, 프랑스 등 성평등을 실현한 국가들의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출산을 독려하기 위한 최근의 대표적 표어가 ‘결혼은 행복의 시작, 출산은 희망의 시작입니다’이다. 이 표어를 보고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표어란 지나간 국민 동원 시대의 철지난 유산일 뿐이다. 젊은이들의 눈높이에서 저출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고 추진되길 소망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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