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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데 중요한 제도 가운데 하나는 언론이다. 그 까닭은 언론이 시민들의 ‘계몽적 이해’를 가능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다음의 다섯 가지 기준을 확보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적 이해의 확보, 의제 설정에 대한 최종적 통제의 행사, 성인들의 수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계몽적 이해란 구성원들이 정책 대안과 이 대안이 가져올 결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동등하고 효과적인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계몽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언론, 곧 공론장(public sphere)이다.

공론장에 대한 선구적 담론을 남긴 이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여론이 형성되는 영역이라 정의한다. 이 공론장 대표 격이 신문과 방송으로 이뤄진 언론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서구 근대 민주주의는 사회갈등들이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토론과 이 토론에 기반한 합의를 통해 해결되는 정치체제다. 공론장은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두 힘인 권력과 자본을 감시·비판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을 민주주의의 핵심 거점이자 보루로 파악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학 개론서적인 내용을 내가 꺼낸 것은 21세기에 들어와 공론장이 처한 상황 때문이다. 최근 이 상황을 가장 적절히 보여주는 개념이 ‘포스트트루스(post-truth)’다. 포스트트루스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뜻한다. 우리말로 ‘탈진실’이라고 옮겨진다. 이 포스트트루스가 급부상한 데는 가짜뉴스의 범람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가짜뉴스는 개인적 감정과 신념에 영향을 미쳐 진실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결국 공론장을 왜곡시킨다.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포스트트루스가 등장한 배경으로 다섯 가지를 꼽았다. 사회심리학적 인지 편향, 전통 미디어의 쇠퇴, 소셜미디어의 출현, 과학부인주의의 등장,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은 ‘확증 편향’ 등 인지 편향과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의 힘이다. 확증 편향이란 새로운 사실을 접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원래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 가짜뉴스는 이 확증 편향을 타고 유포된다. 또, 소셜미디어는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뉴스만을 주로 읽게 함으로써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뉴스 소비의 ‘사일로화’ 경향을 말한다.

포스트트루스를 내가 주목하는 까닭은 최근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은 서로 다른 생각을 수용하는 다원주의와 토론을 통해 이 서로 다른 생각들의 합의를 추구하는 공론장에 있다. 그런데 오늘날 포퓰리즘의 분출과 포스트트루스의 등장이 이 다원주의와 공론장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자신만이 진정한 국민이라 여기는 포퓰리즘이 반다원주의를 확산시킨다면, 포스트트루스는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우리 모두 옳다는 극단적 다원주의를 강화시킨다. 반다원주의적 경향과 극단적 다원주의적 경향 사이에서 민주주의는 적잖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하버마스는 “인터넷이 원심력을 만들어낸다”라는 말을 통해 21세기 공론장의 현주소를 진단한 바 있다. 공론장의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이, 진리의 단수성이 아닌 복수성이 더 힘을 발휘하는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우리 인류는 이미 진입해 있다. 분명한 것은 포스트트루스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가짜뉴스의 범람을 이대로 놓아둘 순 없다는 점이다. 매킨타이어가 지적하듯, 진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고, 그 거짓 정보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가짜뉴스에 맞서는 제도개혁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포스트트루스의 그늘을 강조하는 것은 2020년 올해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뜻깊은 해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1960년 4·19혁명의 60주년,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40주년이 된다. 우리 민주주의는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을 통해 꾸준히 발전해 왔지만, 최근 이 민주주의가 처한 현재와 그 미래가 밝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여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포스트트루스의 등장이다.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건강한 공론장을 위한 생산적인 토론이 활성화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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