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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섰다. 고향과 절은 저물어가는 저녁에 닿는 것이 좋다지만 마음이 좀 급해졌다. 국도에 접어들어 급격한 각도로 몇 번 핸들을 꺾다 보니 방향 감각이 마구 헝클어졌다. 이렇게 모르는 상태, 그게 좋았다. 산 그림자가 길게 덮치는 길에 드디어 이정표가 나타났다. 한 고개를 넘었더니 아연 기린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봉우리가 딱 버티고 서 있다.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어젯밤 읽은 <삼국유사>의 한 장면 속으로 미끄러지는 듯 기이한 느낌이 일순 휩싸고 돌았다. 과연!

작은 인각사. 나의 기대에 견주어 현장을 보고 초라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너무 빠르게 왔다. 오전에 출발해서 오후에 도착한 것이다. 질펀한 속세의 꼬리를 주렁주렁 그대로 달고 와서 절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

늦어도 너무 늦게 왔다. 스님이 집필을 끝낸 후 많은 나무와 돌과 인물이 인각사를 통과해 갔다. 그래도 무슨 연결되는 흔적이 없을까. 산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을 따라 뒷동산에 올랐다. 하늘에서 보낸 눈들이 말씀처럼 쌓여 있다.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나무는 하늘로 걸어간다. 어제의 바람은 메마른 가지 사이로 잎을 떨어뜨리더니 오늘은 그 쌓인 낙엽을 들쑤신다.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엽흔 자국마다 햇빛이 옹기종기 담겨 있다. 스님의 섬세한 눈길도 그걸 모르진 않으셨을 것이다.

많이 늦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 오래전부터 날마다 한번 이 시각쯤에 저 각도로 넘어간다. 가까운 산은 크게 먼 산은 작게 만들면서 어둠의 보자기를 몽땅 씌운다. 느리게 흐르는 그 시간의 한 토막에서 스님은 붓을 들었겠다. 국사전 옆에 옛터에서 발굴한 유구들이 있다. ‘기이(紀異)’로 시작하는 <삼국유사>의 한 대목처럼 짚으면 혹 따뜻할까. 그럴 일은 없었다. 차고 싸늘했다.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몇 번 몸을 뒤틀어 하늘로 진출한 나무. 향나무 아래에서 껍질 하나를 주웠다. 눈도 단단히 뭉쳤다. 집에 가지고 가서 연적에 가두었다가 먹물로 요긴하게 써야겠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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