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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는 네가 아무리 특별하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걸. 좀 더 클 수는 있겠지만 더 중요하지는 않아.” 룰루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한여름 케이프코드만의 광활한 습지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 되고 한순간의 실수로 사랑하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뒤 혼돈에 빠진 ‘나’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이 말은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라는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무력감으로 잡아당기기도 한다. 혼자가 되어 허망함에서 허우적대는 ‘나’는 그 말 속에서도 허우적댄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가?

그사이 라디오 기자를 그만두고 버지니아주로 이사한 ‘나’는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려 소설 쓰기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연인이 왜 떠났는지 깨닫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 투구게나 어떤 벽과 우정을 나누는 여자에 관한 글을 써보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던 와중, 19세기의 생물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점점 집착하게 된다. 당시 밝혀진 어류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종을 제자들과 발견한 조던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탐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지진으로 인해 평생 수집해온 어류 표본들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물고기에 이름표를 꿰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던 조던에게 ‘나’는 기이할 만큼 매료된다. 허망함 속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혼돈을 통제하려는 그 어마어마한 의지는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어쩌면 나에게 벌어진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은 자연에 빈틈없는 질서를 부여하려는 조던의 의지와 자기확신이 유색인, 여성, 빈민은 열등하다고 믿는 과격한 우생학으로 부지불식간에 연결되는 또 다른 혼란으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해나 아렌트는 그 위험에 관해서 이미 다르게 말한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분석하는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는 원인과 기원을 구분한다. ‘원인’이 결과를 유발하는 단일하고 결정적인 하나의 요소라면, ‘기원’은 결과와 연루된 복잡하고 유동적인 여러 요소들이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하나의 명확한 원인으로 귀속하여 미리 식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아렌트는 인간의 역사, 정치, 과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의도를 유일한 결정적 요소로 보는 오만이 놓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그 위험에서 방향을 틀어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적이 있다. <부분적인 연결들>에서 스트래선은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구축하려는 ‘전체’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부분’들 간의 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세계가 부서진 것을 목격한 사람은 그 조각들을 다시 모으려고 한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파열은 곧 확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나’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광활한 자연 속에서 너는 중요하지 않다는 아버지의 조언, 과학 체계에서 보잘것없는 것은 열등하다고 믿는 조던의 의지 바깥에서 ‘나’는 다른 미래를 그린다. 그리고 한 번도 꿈꿔본 적 없지만 지금 무엇보다 원하고 있는 무언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가며, 그러나 여전히 혼돈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범주를 부수고 나왔다.” 때로는 인간에게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혼돈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를 가두는 범주를 부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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