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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은 10년 전 친구의 소개로 한 남성을 만났다. 필리핀인 제럴딘은 어학원 영어교사였고, 남성은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와 수학 교사로 일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하지만 제럴딘이 임신을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임신 소식을 알게되자, 남성은 한국으로 떠났다. 아들 제라드는 아버지 없이 여덟 살까지 자랐다. “아빠는 왜 없을까”라는 의문은 제라드의 정체성에 큰 구멍으로 남았다. 모자는 한국으로 왔다. 낯선 나라의 국회 앞에 서서 피켓을 들었다. “코피노에게 행복을 찾아주세요.” 지난해 한국일보에 소개된 사연이다.

제라드는 ‘코피노(Kopino)’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일컫는 코피노는 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피노 아이들이 아빠를 찾습니다’란 사이트에선 공개적으로 아이의 아빠를 찾고 있고, 현재 32명이 친부를 찾았다.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26일(현지시간) 더블린성 앞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낙태 금지 헌법 조항 폐지’가 결정되자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더블린 _ AP연합뉴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법에 대한 논란을 보자니, 코피노가 떠올랐다. 하나는 청와대 청원에 올라온 ‘히트앤드런방지법’이다. 국민청원에 21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비혼모에게 친부가 양육비를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정부에서 우선 지급하고 당사자에게 원천징수하는 법을 만들어달라는 청원이었다. 정부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할 방안이라고 밝혔다.

또 하나는 낙태죄다.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의 공개변론에 법무부가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것은 “성교하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됐다. SNS에선 ‘#법무부장관_경질’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다.

‘성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무엇인가? 코피노가 떠오른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필리핀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로 낙태뿐 아니라 이혼도 금지돼 있다. 그 결과 비혼모 비율이 높고, 불법 낙태에 의한 여성 사망률도 높다고 한다. ‘성교의 책임을 진’ 여성들은 홀로 아이를 키우고, 아이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자라난다. 4만명 코피노는 ‘성교에 책임을 진’ 행위의 결과인가, 그렇지 않은가. ‘히트앤드런방지법’도 마찬가지다. ‘성교의 책임을 진’ 비혼모들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 어렵게 아이를 키운다. 한부모가족 가운데 77.5%는 법적으로 양육비를 받을 권리인 ‘양육비 채권’을 갖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사회에서 ‘성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그 책임은 여성에게만 요구되며, 남성은 자유로운가. 정상가족 밖의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해서는 어떤 사회적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 책임만 여성에게 묻는 것, 이 지점에 여성들이 분노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현행 법제는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 공개변론에서 법무부 측 참고인으로 정현미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교수가 나와 해프닝을 연출했다. 정 교수는 “출산·낙태는 국가가 강요할 수 없다”며 법무부 입장에 반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정 교수는 스스로도 “낙태에 대해 제가 연구한 결과들이 알려져 있는데도 법무부 참고인으로 선정돼 놀랐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보수적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국민투표가 이뤄져 66%의 지지로 낙태금지 헌법조항이 폐지됐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여성들이 귀국해 투표를 했고, 그 결과에 환호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2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성에 대해 폭력적인 사회 구조가 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투 운동, 그리고 ‘몰카 범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을 요구하는 ‘붉은 시위’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낙태죄 폐지에 대해 해묵은 논리를 반복하고 자신의 대리인으로 ‘반대 입장’을 지닌 학자를 내세우며 자기분열적인 모습마저 보이는 법무부는 보수적이기 이전에 게을러 보인다.

<이영경 토요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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