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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장소에 대한 애착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사라진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클수록 상실감도 크다. <장소의 재발견>의 저자인 앨러스테어 보네트 영국 뉴캐슬대학 교수는 이러한 애착을 ‘토포릴리아’, 장소에 대한 본질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경향신문 맞은편 새문안 일대가 내겐 그런 장소들 중 하나다. 이 지역은 몇년 전만 해도 골목의 정취가 살아 있는 ‘먹자골목’이었다. 할머니의 손맛으로 먹던 ‘콩비지’집, 주 종목은 삼겹살이지만 미리 전화만 하면 회 한 상쯤 거뜬히 차려내는 ‘제주 오름집’이 단골 식당이었다. 비오는 날 ‘문화칼국수’에서 먹던 파전과 걸걸한 막걸리는 왜 그리 맛나던지. 고깃집들만 있던 골목에 어울리지 않게 들어선 이탈리안 레스토랑 ‘아지오’와 ‘비스’는 어쩌다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면 가던 곳이었다. 정갈한 한정식을 내놨던 ‘미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깡통’…. 이 골목엔 주변 직장인들의 곳간 노릇을 하던 집들이 여럿 있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선 광화문 인근과는 달리 개발에서 밀려난 탓에 주택을 개조한 음식점들이 하나둘씩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식당은 돈의문 1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시작되면서 모두 골목을 떠났다. 돈의문 뉴타운 끝자락에 위치한 이 지역은 공원이 되면서 사라질 뻔했다가 서울시가 도심 개발로 사라져가는 옛 골목을 보존하기로 하면서 지금의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들어서게 됐다.
박물관 마을이 조성된 새문안은 1422년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옆에 돈의문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새문’(돈의문)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새문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지역엔 1800년대에 작성된 옛 지적도상의 좁은 골목길과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조건물, 개량한옥, 1970~1980년대 유행한 ‘슬래브집’ 등 국적불명의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시가 또 다른 피맛골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지 않고 도시재생사업으로 개발계획을 변경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바꿔 조성된 박물관 마을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지난달 마을 안에 문을 연 ‘돈의문 전시관’은 이탈리아 식당과 한정식집 건물을 전시실로 바꾸면서 전시실 이름도 ‘아지오’ ‘한정’ 등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아지오 1층에는 전차의 개통과 사라진 돈의문 등 근대 교통·외교 중심지였던 돈의문의 변화상을 담았다. 적어도 이 지역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옛 동네의 모습을, 수많은 추억이 담긴 음식점들을 모형으로 되살린 전시관에서 마주하고 싶지는 않을 테다. 장소에는 사람들만의 오래된 기억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이 떠나고 들어선 박물관 마을은 지난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열리며 한때 북적였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들이 뜸하다. 마을은 대부분의 건물이 공실로 남아 있다. 게다가 돈의문 전시관은 부실공사로 비가 샌다. 기존 음식점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마을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도시재생사업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서울형 골목길 재생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용산구 후암동과 성북구 성북동에서 시범사업을 벌인다고 한다. 우리는 기억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재생사업이 ‘또 다른 개발’을 경유하는 과정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낡은 건물과 오래된 거리들이 보여주기식 ‘박물관’으로 바뀌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파리의 장소들>에서 사회학자 정수복은 “오래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기억의 도시일수록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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