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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벌초하러 가기 위해 배낭을 꾸리는데 KBS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청정 거창, 마음으로 걷다’ 편이 흘러나왔다. 수승대, 고택, 거창사과는 물론 야치기해서 잡은 물고기로 어탕국수를 끓여먹는 것까지를 모두 보느라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추어야 했다. 고향까지 쭉 뻗은 길. 그 길을 신나게 달리면서 45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 체험이 사무치게 좋아진다. 나의 고향은 거창읍에서 덕유산 자락으로 사십여리(里). 내 어머니 머리에 쌀 이고 장에 갈 때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깡촌이었다. 그렇게 나를 길러낸 고향 마을은 지금의 웬만한 아파트 한 동(棟)에도 못 미치는 규모이지만 그때 내 눈에는 아주 으리으리한 마을이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달그락달그락. 책보에서 몽당연필이 필통을 긁는 소리와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가 고프다. 어머니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마당의 감나무에 올라가 매미를 잡기도 한다. 그리고 맨밥을 찬물에 말거나 노란 콩가루에 비벼 후다닥 해치우고 동청(광장)으로 소를 몰고 나간다. 이른바 ‘소먹이’를 하러 가는 것이다.


동청에 모인 소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한다. 풀을 먹고 내놓는 똥은 냄새도 그리 지독하지 않았다. 이윽고 손바닥의 침을 튕기며 결정한다. 오늘은 자루골로 간다! 그 골짜기 입구에 소를 풀어 놓고 우리는 시냇가에서 오후 내내 멱을 감는다. 그리고 해가 엇비슥히 질 무렵 꼴망태를 메고 자루골로 간다. 우리는 멀리서도 워낭 소리나 울음으로 자기 소를 잘 찾았다. 소가 싱싱한 풀들로 배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꼴을 벤다. 


소의 배는 부르고 망태는 불룩하고 우리의 마음도 두둑하다. 소를 몰고 동네로 돌아오면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고 짤랑짤랑 워낭 소리, 수런수런 소의 콧김 소리, 자박자박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때는 저녁이다. 식구들은 두루판에 둘러앉고 소는 외양간에 엎드리고 송아지는 어미소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리고 내가 통통한 보리밥을 우물우물 씹어 먹는 동안 소는 오늘 하루를 되새김질했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소먹이를 하는데 소나기를 만났다. 다른 소들은 다 찾았는데 우리 송아지가 안 보인다. 날은 어두워지고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송아지를 걱정하는 어미소의 뒤척임이 밤새 계속되었다. 다음날 아버지와 나는 어미소와 함께 집을 나선다. 그땐 그저 묵묵히 어미소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윽고 어미소의 긴 울음소리를 듣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아지가 칡넝쿨 덤불에서 뛰쳐나올 때, 넷은 모두 운다. 어느 땐 어미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어른들은 말했다. 소는 절대 달아나지 않는다. 무덤가를 찾아보라고. 그렇다. 하룻밤을 지낸 소는 어느 무덤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찾으러 온 사람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런 날들은 모두 지났다. 시골에 가도 소는 한 마리도 없다. 소는 단체로 사육되고 먹이도 사료뿐이다. 예전처럼 천연의 풀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다. 구제역이니 광우병이니 하는 것들도 이런 환경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방학이면 나는 무조건 시골 큰집으로 갔다. 옛날에는 작두로 짚을 썰어 정성으로 쇠죽을 끓였다. 쇠뜨기, 바랭이 등 야생초와 뒹기(겨)를 넣기도 했다. 우리가 간장이나 고춧가루로 맛을 내듯 이것들은 쇠죽의 양념인 셈이다. 김이 설설 나는 그것을 쇠죽통에 부어주면 소는 혓바닥으로 코를 핥아가며 국물까지 맛있게 먹어주었다. 콧등치기가 달리 또 없었다. 그런 소를 보면서 내 배도 부른 듯 뿌듯해 하던 일이 어제 같다.


내 사무실 책상 귀퉁이에는 낫처럼 생긴 나무토막이 있다. 그것은 쇠죽을 끓일 때 쓰던 뒤집개이다. 몇 해 전 시골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채 버려진 것을 수습해 온 것이다. 그것은 오래 사용해서 닳고 닳은 흔적이 역력하다. 가끔 이 뒤집개를 불끈 잡아본다. 그러면 그때의 일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대진고속도로의 무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자 거창으로 가는 이정표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 고향 거창은 거창한 동네이다. 나는 내일 숱한 추억을 짊어지고 자루골로 간다. 이제 그 골짜기에는 소들은 사라지고 집안의 산소가 몇 기(基) 더 늘어났다. 그리고 사촌 형님이 일군 사과밭이 있다. 골짜기가 깊어 햇살은 더 따갑고 그래서 더욱 높아진 사과의 당도(糖度)! 무주 구천동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신풍령으로 접어들었다. 벌초 마치고 그 빨간 거창사과 한 입 베어먹을 생각을 하며 고개를 넘자니 침도 절로 꼴깍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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