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어느 해든 농사가 그냥 되는 법이 있나!” 석 달 가뭄에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고 돌밭을 일구어 옥답을 만들던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올 같은 바람은 살다살다 처음이네.” “무슨 놈의 비가 오기만 하면 퍼붓는가 몰라” 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해마다 더해 갑니다. 이변이 일상이 되어가면서 단 한번의 집중호우 또는 단 한번의 태풍으로 한 해 또는 몇 해의 노력이 물거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 법’이 없는 농사 이야기는 콩을 심어 콩을 얻는, 말하자면 행동에 따른 정직한 결과가 되기보다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까지의 난관과 극복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자연재해로 ‘○○ 심은 데 ○○ 난다’가 어렵게 되거나 ‘△△ 심었는데 이럴 수가’ 하는 무수한 일들은 원치 않는 드라마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제기랄, 볼라벤과 덴빈에 이은 산바 같은 일일세!”
연이은 태풍의 경로를 따라 내내 두렵고 우울해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2007년 벼가 한참 자라 새끼도 다 치고 조금 있으면 이삭도 품게 될 때였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아무렇게나 꾸며도 예쁜 스무 살 아가씨 정도 되겠습니다. ‘이제 낮잠 좀 자도 되겠구나’ 하는 행복한 생각을 할 무렵, 볏잎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논바닥 전체로 번졌습니다. 비료도 줘 보고 농약도 뿌려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애멸구가 옮기는 줄무늬잎마름병이라는 것인데 이미 못자리 때부터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십년 농사를 지어온 어른들도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난리였습니다.
피해는 서해안 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해당 논의 생산량은 전년의 반절이 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느닷없는 충해였습니다. 재해로 인정하라는 요구와 농업재해보상법을 제정하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급했고 농정 담당자들은 상황을 해석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런 제기랄, 억울함이라도 알려보세!” 농민으로서 잘한 결정인지는 역사가 평가할지, 땅이 평가할지, 벼가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내 논을 갈아엎었습니다. 스무 살의 아가씨를요. 누구는 고생했다고 하고, 누구는 미안하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투쟁의 성과와 전망에 대해 논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좀 아팠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봄까지 집 앞 길산천 건너 처음 장만한 내 논에 가지 못했습니다.
수해복구 나선 육군 장병들이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출처: 경향DB)
2010년 여름 어느 날, 한나절 만에 4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도랑과 개천들이 순식간에 범람했습니다. 금세 그 넓은 들이 원래 바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닭을 키우는 축사는 수중 생태계의 일원이 되어버렸고, 급하게 온 친구들과 함께 닭들만 건져 트럭에 실었습니다. 비 맞은 닭들의 누추한 모습이 ‘40여년을 살아온 내 인생의 꼬라지’와 같다는 몹시 심한 감정이입이 있었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둘째입니다. 가을이 오도록 줄기차게 흘린 땀과 가끔씩 남 몰래 터지던 눈물과 내내 빛나던 지겨운 태양으로 기억되는 여름입니다.
‘내 잘못은 아니잖아!’ 하고 편하게 생각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괜찮아질 거야’ 하는 희망이 손님처럼 머물다 떠나면 나에게만 찾아온 것 같은 절망과 우울은 늘 함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 잦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태풍이나 폭우의 소식과 함께 어르신들의 류머티스처럼 스멀스멀 기어나오곤 합니다.
올여름 끝이 고단합니다. 수확을 앞둔 벼는 고개도 못 숙이고 하얗게 서 있습니다. 바람에 되게 맞은 나락들은 모양만 있지 여물지 않을 것입니다. 낙과 피해를 본 과수농가들도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쉽니다. 물에 빠진 닭을 함께 건졌던 ‘감박사’ 이웃 형님의 감나무에서는 70% 이상의 감이 떨어졌습니다. 가지 끝에 다시 붙여라도 주고 싶지만 붙여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무너진 하우스나 창고를 고치고 날아간 비닐을 다시 씌우면서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된 거. 이 술 한잔 먹고 힘 냅시다” 하거나 “정신 차려! 그깐 일로 농사 접을라고!” 하면서 더 아파하지 않도록 마음을 치유하는 일들은 마을에서 영농회에서 농민회에서 우리 농촌공동체들이 해볼랍니다. 굳이 생색을 내자면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갈 일입니다. 대신 자연재해로 인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농작물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했으면 합니다. 세계적인 식량위기라는 말이 위기라는 느낌도 들기 전에 단골 뉴스가 되어 버린 시대이고 농업을 안보와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국민의 상식이 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다 농민이 살아야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일단은 농민이 살아야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니 농업 생산 체계니 하는 이야기도 점잖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식한테 받을 수 있는 효도는 열 살 이전에 다 받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 여물지 않더라도 봄에 심는 고생과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여러분들이 드시는 것의 팔할입니다.
'=====지난 칼럼===== > 낮은 목소리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은 목소리로]천관산에서 사과 먹는 법 (0) | 2012.10.12 |
---|---|
[낮은 목소리로]‘반전 있는’ 정치 스타일 (0) | 2012.10.05 |
[낮은 목소리로]가을 들판의 사색 (0) | 2012.09.21 |
[낮은 목소리로]고향은 거창했네 (0) | 2012.09.14 |
[낮은 목소리로]‘이웃’의 실종 (0) | 2012.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