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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제자리에 정주하는 식물이 아니고 대지와 분리된 동물계의 일원임이 분명하다. 숙명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괴테)라고도 했지만 그건 차원이 다른 격언일 것이다. 발을 꼼지락거리고 눈알을 굴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스스로도 좀 채신머리없어 보였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러는 것보다 그러지 않는 것이 훨씬 윗길인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이 버릇을 좀체 제압하지 못했다. 서두가 제법 거창해졌으나 별다른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연필 한 자루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추억을 들추기 위해 가끔 두리번거려도 좋다는 것을 말하려고 다소 장황하게 말머리를 잡은 셈이다. 


중국소설을 전공하는 분들의 모임인 중국학센터에서는 방학을 이용하여 오지여행을 떠난다. 일반 관광에서는 경험 못할 쏠쏠한 재미가 있어 나도 가끔 말석을 차지한다. 몇 해 전 처음 동행한 곳이 주자(朱子)의 발자취를 좇는 푸젠성 무이산 여행이었다. 과연 중국다운 중국제(製) 풍경. 일필휘지로 내갈긴 한자(漢字)를 그대로 빼박은 듯한 산수(山水). 그 자연의 호방한 풍경 앞에서 실컷 두리번거렸다. 호텔에 투숙한 뒤 낯선 방의 구조와 구비된 품목을 보면서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안내책자 옆에 놓인 필기구에 주목을 했다. 하룻밤 뜨내기손님에게 제공하는 그것의 품질이야 뭘 따지랴만 나중 시간이 흘러 수중에 남는 건 그 필기구와 그에 촉발되어 떠오르는 몇몇 기억들뿐일지도 모를 테니깐.


그런 이유로 필기구에 눈독을 들이는 편인데, 그때 무이산 근처에서 만난 필기구에 그만 혹, 하고 말았다. 그것은 허접스러운 연필이었다. 연필은 연필이되 나무에 흑연을 박아놓은 고래(古來)의 연필이 아니었다. 하얀 플라스틱의 몸체 끝에 흑연을 박아놓은 것이었다. 연필심은 새끼손톱보다 약간 짧았고 몸체는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길었다. 그래도 그 연필심이 닳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공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똥이 나오는 볼펜이 아니라서 좋았고, 간단해서 좋았고, 볼품이 없어 좋았고, 일견 조잡해서 좋았다. 앞으로 그 연필 끝에 침 묻혀가며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가지 주르륵 엮어지기도 했다.


옆방에 부탁해서 몇 자루 더 챙겼다. 그러고도 욕심이 생겼다. 호텔을 나설 때 복도에서 청소하는 분들을 용케 만났다. 수건, 비누, 칫솔 등 각종 소모품들이 즐비한 카터에 연필통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연필을 보여주며 웃었더니 마음씨 좋게 한 주먹 쥐여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 연필은 애장품이 되었다. 멀리 꽃산행을 갈 때 꼭 챙기는 품목이다. 야생화 공부할 때 사진 찍는 게 마냥 능사는 아니라서 식물의 특징을 나름대로 그리면 오히려 관찰이 더 잘된다. 그럴 때 그 연필이 한몫을 톡톡히 담당한다.


중국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에서 무장한 채 구보하고 있다.


지난달 중국학센터에서는 신장 위구르 지역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탐험하는 여행을 했다. 중국이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는 가장 서쪽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떠나기 전 검색을 해보니 분리독립 운동으로 인한 긴장감이 팽팽하다고 했다. 우루무치에서 첫밤을 보내고 새벽에 일어나 무심코 창밖을 보니 호텔 건너편 어느 중학교 운동장에서 기이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갑차들이 주둔한 가운데 수십 명의 군인들이 진압훈련을 하고 있었다. 문득 기시감이 일어나고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두번째로 들른 사막도시 카스(喀什, 캬슈가르). 중국 공안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곳곳에서 번뜩였고 장갑차가 도심을 질주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여러 차례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신덕상무주점(新德商務酒店)이라고 하는 호텔에 가서 여장을 풀고 두리번거릴 때 얼른 눈에 꽂히는 게 있었다. 중국 호텔의 필기구는 하나로 통일한 듯 그것은 예의 그 연필이 아니겠는가. 손잡이에 박힌 상호만 달랐다. 주자의 고향에서 본 것과 같은 조잡한, 볼품없는, 그러나 쓸모 있는, 참 밉지 않는 연필 한 자루. 그날 밤, 기름진 저녁을 먹고, 독한 백주를 들이켜고, 카스의 거리를 헤맨 뒤 알딸딸한 기분으로 침대 머리맡에 앉아, 흑연에 침 묻혀가며, 호텔 메모지에 갈긴 흔적을 여기에 옮겨본다.


타클라마칸 사막.


“멀구나. 아득하구나. 우리나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보잘것없는 연필에, 침을 묻히며, 사각사각 글 쓰는 마음. 이 연필은 깎을 테두리 나무가 없다. 흑연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지금 굳이 침을, 고인 침을 기울여, 연필심에 묻히는 것은, 그 두꺼운 흑연을 녹이려는 뜻도 있거니와, 그냥 단맛, 쓴맛, 짠맛을 기억하며, 누구 말마따나, 그래도 그 모든 맛난 것들을 저 혼자 독차지하고 누린 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하여. 실제로 그렇게 혀를, 의례적인 단어와 말에 굳을 대로 굳어진 혀를 날카롭고 뾰족한 연필 끝으로 찌르자, 이역만리의 낯선 지방에서, 어린 시절의 많은 일들, 우리가 통과해낸 지독했던 날들이 사막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구나! 타클라마칸 변방에서.”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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