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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코미디언 아니타 렌프로가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 텔 서곡>을 익살스럽게 개사한 일명 ‘엄마송(William Tell Momisms)’은 가히 전 세계 엄마들의 ‘숙명’인 ‘잔소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일어나라, 세수하라, 숙제 챙겨라, 전문가들이 강조한 대로 아침은 꼭 먹어야지…. 일상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말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내 말을 듣고는 있니, 식탁에서 문자질 말고, 오늘 컴퓨터 시간은 끝났어, 물건 좀 제자리에 놓으렴…. 매일의 실랑이가 고스란히 재현된다. 압권은 엄마가 이럴 수밖에 없는 까닭을 해명, 아니 합리화하는 대목이다. 네 친구들이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테냐, 한 번만 더 말하면 천 번도 훌쩍 넘겠다, 네가 나이가 들면 지금 내 말들을 고맙게 여기게 될 게다…. 그리하여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내일도 오늘과 같은 잔소리가 변함없이 반복되리라는 확인이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는 엄마니까! 마더, 마미, 에미, 어무이니까!

통렬한 가사에 한바탕 웃었지만 왠지 뒷맛이 씁쓸하다. 잔소리의 폭포수 속에 ‘대화’는 없다. 교육학자들이 권고한 대로 “자, 이제부터 대화하자!”며 아이들을 붙잡아 앉혀보지만 나오는 말은 여전히 잔소리뿐이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대화’란 교훈과 훈계 그리고 설득이 멈춘 그 다음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너 잘되라고, 지금은 절대 모르겠지만 언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고 하는 이야기라지만 조금만 머리가 굵은 아이라면 그 앞에서 금세 입을 잠가버린다. 그러면 답답해진 엄마는 또 다시 굼뜨고 게으르고 무계획적인 아이에게 잔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날로 심각해져가는 상황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학교는 ‘3무(無)’상태라고 일컬어진다. 무감각, 무절제 그리고 무감동.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잘 웃지 않는다. 화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 제멋대로다. 비평준화 지역의 외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정원 40명으로 시작된 한 반이 학기가 끝날 무렵 22명밖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고한다. 그렇게 학교를 이탈한 아이들이 연간 6만여명에 이른다. 용케 ‘견뎌내어’ 대학에 진학해도 학습된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성적 상위 1~2%에 들어야 간다는 의대에서조차 15%의 학생들을 ‘무동기 학생’으로 분류한다. 동기가 없으니 학문은 물론 삶에 대한 열정이 없다. 한번도 뜨거워본 적 없는 삶, 그것은 단지 생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경향DB)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엄마의 사명과 숙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중 문득 실마리를 찾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산행에 나선 길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들과 엄마의 산행’을 콘셉트로 한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까칠한 사춘기 아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는데 ‘미끼’가 된 것은 산행코스에 포함된 ‘노인봉’이었다. 아이는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 금지구간을 피하느라 놓친 오대산 노인봉을 종주가 끝난 지 두 해가 넘어가도록 아쉬움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봉우리 한 개를 밟지 못했으니 ‘진짜’ 종주가 아니라는 둥, 언젠가 혼자서라도 반드시 오르고야 말겠다는 둥, 평소와 다른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의 ‘덕후’ 기질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는데….

산을 오르며 보았다. 자기가 진짜 바라는 것을 향해 훨훨 날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카메라까지 앞질러 산길을 뛰어가는 아이에겐 잔소리가 필요치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길을 너무 잘 알았다. 오랜만의 산행에 힘이 부치고 협찬 받은 등산화에 발이 아파 허덕이는 엄마를 기다려주고 밀어주며, 자연 속의 아이는 이미 옹골찬 젊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봉 정상에 서서 환희로 빛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그 길이 무엇이든, 설령 험로거나 막다른 길일지라도, 아이가 진정으로 가고픈 곳으로 떠나보내야 마땅하리라고.

자연속에서 아이는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산 아래 세상에서는 약자가 된다. 입시, 학원, 스펙 따위의 각종 정보를 틀어쥔 엄마라는 강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엄마의 잔소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연적이지 않은지, 기괴한 인위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어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슬픈 아이들의 심리학>에서 말하듯 “식물이 물과 햇빛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아이도 눈물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붙잡아줄 어른이 필요”한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아아, 깨닫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려워라! 아무리 다짐해도 산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엄마의 숙명인 잔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등산화 벗어라, 가방 챙겨라, 손 씻어라…. 커다란 바위 같던 아이가 자갈처럼 쪼그라든다.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산을 타듯 검질기게 삶을 넘어야 한다. 엄마의 사명은 오로지 그것이리라.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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