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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잠시 수그러들고 먹구름이 옅게 흩어지던 어느 날 오후, 그는 교회 앞마당에 서서 잔잔한 남서풍에 실려오는 희미한 바다 비린내를 맡았다. 굵은 비가 쏟아진 직후의 바다 비린내는 거칠고 차갑다. 고기잡이배에서 막 내려서는 바닷사람의 냄새가 꼭 그렇다. 그의 교회가 있는 서천의 바닷가 마을에는 이제 그런 사람이 없다. 마을은 더 이상 바다에 기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리 기댈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교회처럼. 혹은 그처럼.


파란 샌드위치 패널로 벽을 두르고 붉은 함석지붕을 올린 교회당에는 앞좌석의 등받이가 뒷좌석의 책받침대로 이어지는 긴 나무의자가 열 개씩 두 줄로 놓여 있고 그 중앙에는 가슴 높이의 작은 설교대가 있고 왼쪽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다. 그 외의 장식이나 기물은 하나도 없는 단출하고 작은 공간인데, 주일 예배시간에는 채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신도들이 띄엄띄엄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어 교회당은 넓어 보이기까지 한다.


신도들 대부분은 목사인 그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다. 농사가 생업인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더불어 교회와 그도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 몇 해 전 사회복지사 자격을 딴 그의 아내는 남당지역아동센터에 일을 나가 돈을 번다. 서울에 있는 대학생 아들의 학비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다.



그는 코끝에 조그만 돋보기안경을 걸친 채 거실 한 구석에 있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에 읽을 성경구절을 찾느라 가장자리가 닳고 닳은 까만 가죽표지의 성경책을 뒤적이며, 내가 마지막이겠지. 이 교회 목회자로는, 이라고 혼잣말처럼 희미하게 말했고, 식탁에 앉아서 아동센터 아이들의 두툼한 상담일지를 밤늦도록 정리하던 그의 아내는 아무 대꾸 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그를 넘어서 아주 먼 곳을 향한 듯했다.


성경책을 뒤적이던 손을 멈춘 그가 또다시 혼잣말처럼, 희미한 선로마저 오래전에 지워진 이름 없는 종착역 같은 곳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야. 어느 목회자가 이런 델 들어오겠어? 이 교회당도 오지 않을 목회자를 기다리다 결국 스스로 허물어지겠지. 세파를 이겨내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신앙도 예외는 아니지, 라고 조용하고 씁쓸하게 말하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성경구절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작은 소리로 읽어나갔고 그녀는 상담일지를 보던 시선을 그대로 두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당신 같은 사람은… 아니 당신 같은 목회자는 아주 예외적이지요, 라고 건조한 바람 같은 낮은 목소리로 스쳐가듯 말했는데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잠깐 움찔하고 멈추었다가 다시 다음 구절을 짚어나갔고 그 구절들을 읽어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끝마디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구절을 다 읽은 그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한 손으로 벗으며, 구원을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마치 영혼이 없는 존재처럼 뭔가를 좇아 마구 내달리고 있어. 이 말씀은 그래서 더 긴박하고 간절한 거겠지, 라고 말한 뒤 앉은뱅이책상을 향한 몸을 조금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식탁에 펼쳐진 상담일지에 뭔가를 기록하면서, 아마도 돈과 목숨이겠지요,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이라고 짧은 한숨을 섞어 가볍게 말하고는 그를 향해 눈을 들었고,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그 눈동자는 텅 빈 스크린처럼 멀고 쓸쓸했다.


잠시 후 그녀는 머릿속 집요한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좌우로 조금 흔들고 나서 상담일지에 다시 시선을 돌리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에요, 라고 나직하지만 곱씹듯이 말했고, 그는 한 손에 안경을 든 채 그녀를 조금 심각한 눈빛으로 잠시 쳐다본 뒤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육신에 양식이 필요하듯 영혼도 마찬가지야. 영혼의 양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이 방황할 뿐이야. 난 그 양식을 전하는 사람이고, 라고 말했는데 그의 둔중한 목소리가 차분한 거실 공기를 어색하면서도 무겁게 흔들었고 그녀는 상담일지를 가만히 덮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소 높은 톤으로, 당신 삶은 그런 거겠죠. 당신 아닌 삶은 모두 어린 양들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난 길 잃은 양이 아니에요, 라고 말했고 그 목소리는 흔들리는 거실 공기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몇 번 한 후, 난 내일 새벽에 봉독할 성경 말씀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당신을 탓한 게 아니야, 라고 말하며 화제를 돌렸는데 그것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흔들리는 시간을 뒤늦게 감지한 사람의 당황스러운 머뭇거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어제가 결혼 25주년 되는 날이었어요. 당신은 까맣게 잊고 있었겠지만. 물론 당신에게는 목회 25주년이 훨씬 더 소중한 날이겠지요. 지난 시간들이 당신에겐 축복받아 마땅할 목회의 날들이었겠지만 나에겐 어쨌든 살아내야 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목회자의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말이죠. 그 시간들은 싸늘하게 등을 돌린 채 나를 거슬러 흐르는 침묵의 강물 같았어요. 매 순간 그걸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내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우린 서로에게서 멀리 어긋나 있어요, 라고 말했을 때 그의 깊게 주름 잡힌 눈두덩에는 미세한 떨림이 파르르 일었고 그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아니야 당신이 아니었다면 목회는 단 하루를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당신과 함께 걸어온 길은 하나님 앞에서 확고해. 세상이 우리와 어긋나 있을 뿐이야, 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세상을 감당하는 건 늘 내 몫이었지요. 그건 나 자신을 배반하는 날들이기도 했고요, 라고 말했고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녀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오래된 생각을 말하듯 나직한 말투로, 결혼 25주년이 이렇게 아무런 바람 없이, 이렇게 메마르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우리 삶은 어느 지점에서 사라진 걸까요? 그건 현실 앞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꿈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달아나는 꿈을 우리는 왜 잡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두려웠을까요? 창백하게 드러나는 진실이, 라고 말했다. 그는 손에 들었던 안경이 거실 바닥에 떨어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굳은 자세로 할 말을 잃었고 그의 눈두덩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25년 전, 그의 첫 교회는 청양 백월산 기슭 산골마을의 밀알교회였다. 목회자가 없어 3년 동안 비어 있던 그 교회는 교회당이라기보다는 허물어져가는 집이었고 삭은 함석지붕에서 비가 샜고 밤에는 하얀 달빛이 천장을 통해 방 안으로 길게 스며들었다. 첫 새벽기도 시간, 신혼의 그와 아내가 교회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그들 뒤로는 텅 빈 의자들뿐이었다. 그가 성경책을 펴고 성경구절을 읽으려는 순간, 맞잡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옆에 앉은 아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큰소리로 성경구절을 읽었고 아내는 기도시간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세 번 더 교회를 옮겨다녔고 그 모두는 다른 목회자들이 꺼리는 작은 시골교회들이었다. 아내는 묵묵히 그를 따랐다.


장맛비가 다시 고개를 들던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 그와 아내는 교회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그들 뒤로는 팔순에 다가선 할머니 두 사람이 따로따로 앉았다. 그는 한두 번 헛기침을 한 뒤, 마가복음 8장 34절부터 35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라고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뒤 성경책으로 시선을 돌리던 중 아내의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손을 보았다. 그 손은 25년 전 첫 새벽기도 때의 그녀 손처럼 여전히 작고 연약했는데, 결혼반지가 사라진 허전하고 쓸쓸한 그 손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서글프고 아팠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결혼의 금반지를 끼워주었던 저 손에 하얀 은반지를 다시 끼워주고 싶다.




한승오 | 농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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