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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 어때요?” 지난 주말, 시 쓰는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북악 스카이웨이에 올랐다. 서울의 북쪽 능선은 봄을 맞이하느라 숨이 가빴다. 아직 덜 늙은 후배는 꽃놀이 타령을 늘어놓았다. 내친김에 섬진강이나 강릉 쪽으로 내빼자는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에도 일정이 빠듯했던 나는 어깨가 처지고 볼살이 늘어지는 사태에 대한 넋두리로 서울 바깥으로 나가자는 후배를 가로막았다. 스카이웨이에서 바라보는 서울 상공은 흐려 있었다. 꽃과 새순을 밀어올리느라 헉헉대는 숲 사이로 봄날 저녁이 빈틈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박명(薄明)이라고 발음해보았다. 박명. 헤어지기가 서러워 옷소매를 부여잡는다는 몌별(袂別)이란 말도 떠올랐다. 칼국수? 입맛이 칼칼하던 차였다. 좋지. 그래, 혜화동으로 내려가자. 성북동 비탈로 접어드는 사이, 잠깐 백석의 애인과 그녀가 스님께 물려준 큰 음식점이 생각났다. 그 음식점은 사찰로 다시 태어났다. 길상사. 기둥과 벽에 밴 고기냄새를 없애느라 몇 년 고생했다는 후일담을 들은 적이 있다. 길상사 어귀에도 땅거미가 배어들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든 후배가 칼국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나와 20년 넘게 차이가 나니 신세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찾는 그 칼국수집이 자기도 단골이라는 것이었다. 칼국수에 대한 취향이 나이와 무슨 상관이랴만, 흐린 봄날 저녁, 시에 대한 긴장감을 잃어가는 것을 나이 드는 것으로 발뺌하는 선배의 허한 심사를 읽어내는 후배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아랫배 단전 부근이 조금 더워졌다.

예상 밖이었다. 휴일 저녁이라고 하지만 손님이 너무 많았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후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년 전만 해도 젊은이, 특히 어린이는 찾아보기 힘든 집이었다. 면발이 흐물흐물한 데다 국물이 진한 편이어서 중년층 이상, 그것도 아는 사람들만 찾는 집이었다. 이십여년 전, 회사가 광화문에 있을 때, 이런 봄날이면 선후배와 뭉쳐 이 집에서 한나절을 죽이곤 했다. 매실주에 문어를 놓고 권커니 자커니 하며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곤 했다. 그때는 우리가 가장 젊은 손님 축에 들었다.

혹시? 예상한 그대로였다. 얼마 전 공중파 ‘먹방’에 소개됐다는 것이다. 그 이후 손님이 바글바글해졌다는 것이다. 칼국수며 무채와 함께 버무린 부추김치 맛은 그대로였지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왜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지 곰곰 따져봤다. 어린아이들이, 젊은 연인들이, 가족들이 수십년째 옛 맛을 고수하는 칼국수집을 찾는 것이 문제일 리 만무했다. 그러기는커녕 반갑다고 손뼉을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창경궁 쪽으로 차를 몰던 후배가 먹방의 폐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맛있는 녀석들’은 개념 먹방 프로그램_경향DB

후배의 날카로운 대중문화 비평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그래, 모험이 사라졌지’라며 끼어들었다. 휴대전화가 인터넷과 만나면서, 인터넷이 소셜미디어(SNS)를 일상화하면서 모험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른바 맛집은 물론이고 여행을 포함한 모든 쇼핑이 인터넷을 매개로 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 이전의 여행이 설렘으로 가득했다면, 그 설렘의 대부분은 예측 불가능성에 바탕을 뒀다. 가서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잘 것인지는 현지에서 해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예약한다. 볼거리, 먹을거리까지 떠나기 전에 다 결정된다.

지친 몸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가 겨우 찾은 낡은 여관방, 택시기사나 공무원에게 수소문해 찾아간 그 지역 사람들만 찾는 음식점,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삶의 고수’들, 지갑을 잃어버려 낙심하고 있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내밀던 노인…. 이런 장면은 이제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대학 입시를 위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본 경험이 있는 청년들, 돈에 대한 관념이 거의 강박증에 가까운 젊은이들에게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거의 외계여행에 가까운 비현실일 것이다.

우연, 돌발상황, 낯섦, 불편함, 무료함, 망설임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여행에 관한 한 예측 불가능성은 배제됐다. 아니 여행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다. 여행이 아니고 관광이다. 아니, 관광 상품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고 오직 눈으로 관광 상품을 소비한다. 아니, 떠나기 전에 스마트폰 액정화면에서 미리 관광한다. 인간이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인간을 소비한다는 한 사회학자의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주저하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스마트폰이 우리 대신 판단한다. 혹시 ‘알파고’가 오랜만에 단골 음식점을 찾아가던 봄날 저녁의 상념이나 망상까지 대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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