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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마을의 봄은 형형색색 꽃들이 피면서 시작한다. 지난겨울 펄펄 내리는 백설 위에 선연한 자태를 드러낸 붉은 동백에 이어, 3월 내내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내뿜었다. 지금은 온갖 새들의 노래와 함께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이토록 눈과 귀가 즐겁다니! 지금 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청복(淸福)을 누리고 있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임을 실감한다.

올해는 큰맘 먹고 암자 곳곳에 산수유와 수국, 수선화, 작약을 심었다. 나도 좋으려니와 암자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꽃 공양을 올리고 싶어서이다.

사계절 내내 숲에서 살다 보면 꽃은 그저 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타는 듯한 가뭄을 만나고 한겨울 모진 추위도 견뎌내야 한다. 병해충에도 맞서야 한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천둥과 무서리, 비바람과 땡볕을 이겨낸 뒤에야 꽃은 비로소 맑은 향기와 고결한 자태로 피어나는 것이다. ‘한 송이 꽃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경전 구절 앞에 새삼 뜰 앞의 청매화가 눈물겹고 고맙기만 하다.

매화를 비롯해 난초, 국화, 대나무 등 사군자는 선비의 품격을 상징한다. 사군자는 본래 문인화의 소재가 되기 전 중국 전국시대 사람인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신능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꽃의 성품과 사람의 인품이 어우러진 것이다. 조선시대 신흠은 예찬했다.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사람과 꽃이 지닌 맑고 높은 품격, 그것은 바로 ‘지조’라 할 수 있다.

재물과 부귀권세 앞에서 올곧은 신념을 바꾸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매화와 대나무의 꽃말을 헌정한다. 그러고 보니 지조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온다. 지조와 함께 시대가 밀어낸 말들을 생각한다. 인품, 의로움, 신념, 청렴, 명분, 어짊과 예의 등. 이런 덕망 높은 말들은 오늘날 출세와 득세 앞에 잊히고 박제화되었다. 말(言)의 교체는 가치의 전도이고 삶의 혼돈이다.

해남 땅끝 마을 입구에서 전망대까지 운행하는 땅끝 모노레일_경향DB

꽃이 만발하는 봄날,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를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글이 있다. 일제강점기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다.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수의와 함께 보냈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는 어느 선사의 오도송보다 더 큰 울림과 깨우침을 준다.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일신의 안위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변절을 서슴지 않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모성과 인정을 밀어내고 꿋꿋하게 지조와 절개를 지켜낸 안 의사의 어머니야말로 청청하고 곧은 대나무이며, 긴 세월을 지나 오늘까지 전해지는 매화 향기다. 사적인 이익 앞에 대의와 명분을 가볍게 버리는 오늘 우리의 자화상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4·13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죽비는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다. 이 글은 1960년 ‘새벽’지에 실린 글이다. 혼란스러운 자유당 시절에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내린 준엄한 직설이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렇게 지조를 정의하면서,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해 신념을 버리고 권모술수에 능한 이는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또 공인의 무절제와 변절 앞에 절망하는 국민을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의 구절을 들어, 지도자와 정치인은 지켜보는 국민이 있음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해 좀 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당부를 한다.

50여년 전 글이지만 오늘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또 일제강점기처럼 생명과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오늘날에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쉽게 말과 처신을 바꾸는 지식인과 정치인에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와 조지훈 선생의 지조에 대한 일침은 우리 모두 새겨들어야 할 몫이다.

다가오는 4·13 총선에서 우리는 정략과 사적 이익을 따라 변절하는 후보를 잘 가려내야 한다. 꽃 본 듯이 반가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지금 지조와 의로움의 말들을 다시 불러내야만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봄날, 꽃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법인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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