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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직장에서만 20년 넘게 잡지 편집 일을 하고 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이 복일 수도 있겠지만, 오래도록 일을 하며 나를 거쳐 간 후배 편집자들이 8~9명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신입을 뽑아서 2~3년쯤 편집의 기초부터 인쇄 실무까지 출판의 전반적인 것을 익히면 붙잡아볼 새도 없이 서울의 중견출판사로 이직한다. 떠날 때마다 새로 뽑는데 신입 편집자 한 명을 뽑으려 해도 서울이 아니라서 어렵다. 인천이 무슨 지방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인천 사람을 서울로 불러들이는 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서울 사람 보고 인천 한 번 놀러오라고 하면 다들 난감해한다. 그런 탓인지 서울에선 비교적 쉬운 일도 인천에선 좀 더 공력을 기울여야 할 때가 있다.

떠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할 일은 절대 아니다. 문화 분야의 여러 곳을 분탕질했던 최순실·차은택조차 무시할 만큼 출판계가 영세하다는 것, 편집자가 박봉이란 건 어느새 비밀도 아니다. 그렇게 직장을 한두 군데 옮겨야 그나마 월급이 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예전에는 출판사 내부에서 신입 편집자를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인턴 문화와 비정규직 고용이 일상화되면서 이른바 ‘초짜’들은 아예 그런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그런 형편이니 영세출판사가 초보들을 뽑아 가르치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보다 나은 조건의 출판사로 옮겨가는 구조가 되었다. 기업 스스로 인력을 키우고 교육하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좀 더 영세한 업장이나 사회로 고스란히 전가하는 인력재생산 구조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덧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는 이른바 “초왕이 잃어버린 활은 초나라 사람이 줍는다”란 고사가 있다.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하나였던 초(楚)나라 공왕(共王)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아끼던 활을 잃어버리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신하들이 황급히 나서며 저마다 활을 찾아오겠다고 하자, 공왕이 의연하게 말했다. “그만두어라. 초왕이 잃어버린 활은 어차피 초나라 사람이 가지게 될 터이니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만류했다. 이 일화는 임금의 너그러운 마음을 칭송하는 말로 오랫동안 전해졌다. 그러나 훗날의 공자(孔子)는 “애석하구나. 도량이 좁은 사람이로다. 사람이 잃은 화살을 사람이 줍는다고 하지 못하고 하필 초나라 사람이라 하다니(人遺之 人得之 何必楚也)”라며 탄식했다.

공자는 어째서 애석하다고 했을까. 잃어버린 활을 찾기 위해 신하와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괜찮은 왕이었겠으나 그의 도량과 포부가 ‘초나라’란 좁은 틀 안에 갇혀 있었기에 ‘천하(天下)’를 볼 수 없어 안타깝게 여긴다는 말이었다.

나는 여기에 공자와 유교의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자(老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이란 말조차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평했다. “그저 ‘잃으면 줍는다’라고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이라고 했다니, 노자는 인간의 천하를 넘어 만물천지(萬物天地)를 품었던 셈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가지만, 해마다 제때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해 휴학하는 학생을 한둘은 만나게 된다. 놈 촘스키는 “학창 시절 엄청난 빚을 지게 되는 학생들이 사회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긴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채무 시스템에 가둬 놓으면 생각할 시간마저 가질 여유가 없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등록금 인상은 일종의 훈육 테크닉입니다.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 되면 단지 빚에 찌들게 되는 것뿐 아니라 훈육의 문화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비자 경제의 훌륭한 부속이 되어갑니다”라고 했는데, 오늘날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그 출발부터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사형대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내 자식 네 자식 구분하지 않고 사람 하나 키워낼 수 없는 곳이라면 젊은이에게 자식을 낳아 키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성원 | 황해문화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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