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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의 진로는 세 가지다. 자사고나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가는 유형.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에 가서 취업 후 퇴사하고 대입을 준비하는 유형. 그 사이엔 대다수의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이 있다. 이들 청소년은 일반고에 가며 널브러짐과 방황을 반복하다 나이를 먹는다. ‘문화과학’ 2014년 겨울호에 실린 강정식(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의 분류다. 첫째는 1%의 1%가 되려는 ‘자기경영적 주체’고, 둘째는 경쟁 탈락을 걱정하는 ‘불안정노동 주체’다. 글쓴이는 이 중 셋째 유형의 청소년들을 염려한다.

“이도 저도 아닌” 청소년들은 20대를 어찌 보낼까. 대학엔 가지만 졸업유예생과 취업준비자로 지내다 훌쩍 30대의 모태 솔로가 된다. 공무원과 정사원의 동아줄을 잡지 못한 그들 중 다수는 “비가시적 삶”을 산다. 비가시적 삶이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상태다. 즉 2030 청년을 “광범위하게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 배제된 그들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모두가 아프다’까지 헛갈리는 말만 맴돈다. 청년취업자 숫자는 비정규직만 늘리고 청년실업률은 역대 최고인데도 우리 정부는 작년 일자리가 12년 만에 최대치라며 한술 더 뜬다.

이에 비해 이웃 일본의 청년·청소년 정책은 ‘최소한의 국가 도리’에서 앞서 있다. 경제 거품이 꺼진 1990년대부터 부등교(탈학교)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청소년 문제를 공론화하고 프리터(freeter)와 니트(NEET)로 확장된 청년 문제를 정책 의제로 다뤄왔다. 중앙정부는 주요 도시에 ‘지역 청년 서포트 스테이션’을, 지방정부는 와카모노(若者) 지원 부서를 신설해 지역과 밀착하고 있다. 와카모노는 미혼의 15~35세 ‘젊은이’라는 말로 ‘패기 있는 청춘’이 아니라 요즘엔 ‘진로 및 취업에 곤란을 겪는 사회적 약자’로 통한다.

가나가와현 요코하마(360만명)시는 젊은이의 교육, 복지, 고용을 통합한 아동·청소년국을 운영한다. 도쿄도 세타가야(85만명)구는 구장 직속의 와카모노 지원부를 만들고 와카모노 종합지원센터(상담과 소그룹활동)와 노게(野手)청소년교류센터(자립활동)를 운영한다. 여기선 고도성장기의 단순 취업 알선보다 저성장 혹은 탈성장 사회의 청년·청소년을 돕는 사회서비스를 제공한다. 치유, 공생, 학습, 직업훈련, 워킹캠프 등 시간을 두고 사회관계 형성과 자립을 지원한다.


그럼에도 일본 청년은 ‘나아질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에 자족하는 사토리(悟り) 세대로 불린다. ‘욕망하지 않고 득도했다’는 뜻의 사토리 세대론은 후루이치 노리토시(30세)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일본 2011)에 의해 주목받았다. 무업자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일본 청년은 오늘이 행복하다니 논란이 왕왕했단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의 저자 오찬호 박사는 이 책 해제 말미에 이렇게 썼다.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만족하는 행복한 젊은이’조차 등장할 수 없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사회가 이 모양인데 더 이상 뭘 하겠어? 이제 내 행복, 나 스스로 찾겠어!’라는 ‘행복한 젊은이들’이 일본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나마 자신을 사회적 관계 내의 ‘피해자’로서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다.” 우리 청년에게 이런 각성을 촉구하려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해야 한다.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들”의 등장을 기대하려면 우리 정부도 일본 정부처럼 ‘최소한의 국가 도리’를 해야 한다고. 그 도리를 다섯 개로 요약해보자. 1. 노동력 과잉공급의 시대에 일자리가 없다고 청년이 일할 수 없는 건 아니다. 2. 청년에겐 저임금의 단기 일자리 양산보다 다양한 질의 일거리가 필요하다. 3. 다양한 질의 일거리는 경제적 생산성보다 사회적 활동성으로 평가한다. 4. 사회적 활동성의 수요는 세타가야구 같은 생활권 지역과 마을에 많다. 5. 자유학기제 청소년부터 지역과 마을에서 그런 일거리를 체험 학습한다.

이런 ‘최소한의 국가 도리’가 먼저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청년·청소년 정책이 일본처럼 변하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이 땅에 ‘청년·청소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된다. 1월9일 KAIST 미래전략대학원의 토론회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서 박성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사는 20~34세 청년층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한 청년의 42%가 “붕괴, 새로운 시작”을 원한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원한 청년은 23%였다. 어쩌면 일본 정부는 “붕괴”를 피하려고 와카모노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도리’를 서둘러 시작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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