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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잘살아보세’는 1962년에 나왔다.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이다. ‘군사혁명’을 기념한 5·16 예술제에 선뵌 뒤 시시때때로 울려퍼진 이 노래를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이들이 현재 50대 이상이다.

1절은 “절로 부귀영화 우리 것”을 만들자며 “잘살아보세”를 선창하고 후창한다. 2절 후렴구는 “일을 해보세”로 “태양 너머에 잘사는 나라”를 따라잡기 위해서다. 3절은 “뒤질까보냐” “세계를 향해” 내달리자고 하고 후렴구는 “뛰어가보세”다. “잘살아보세”는 목표이자 윤리, “일을 해보세”는 지상 과제, “뛰어가보세”는 행동강령으로 읽힌다.

<노래 ‘잘살아보세’에 담긴 경제발전전략>이란 글이 한국선진화포럼의 ‘선진화포커스’에 실린 건 재작년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3000달러, 무역액 1조달러, 세계 7위의 수출대국이라는 금자탑”은 잘살아보자며 산업역군으로 뛰어온 결과다. 이로써 “대한민국과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운명”이 갈렸다고 글쓴이는 썼다.

그 운명의 길을 따라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는 노인이 되었고 흥남부두에서 생이별한 부친을 떠올리며 독백한다. “이만하믄 내 잘살았지예?” 많은 관객을 울컥하게 만든 이 감수성의 결정체가 노래 ‘잘살아보세’다.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는 1972년에 나왔다. 방송은 매일 낮밤 이 노래를 새마을운동 뉴스와 함께 틀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로 시작하는 노래의 요지는 이렇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하여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새조국”의 국민이 되자는 것이다. 40대 이상이면 동네, 학교, 일터에서 주야장천 듣고 자랐다. 영화 <강남 1970>엔 이 노래가 스피커로 왕왕 쏟아지는 아침 청소 풍경이 나온다. 이런 일상은 얼마나 오래갔을까.

1993년 12월6일 동아일보 ‘독자의 편지’엔 무안군 일로읍 월암리에 사는 문춘초씨의 글이 있다. 제목은 ‘청소차 새마을 노래 방송 말자’로 “현실과 거리가 먼 청소차의 새마을 노래”가 “귀만 따갑고 심한 거부감”을 주니 중단해달라는 주문이다. 5년 뒤 1998년 2월1일 경향신문엔 이런 기사가 났다. “서울대 대학원 기계설계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는 노상도씨(27)는 최근 결혼과 동시에 집 전화응답기에 ‘잘살아보세’ 노래를 녹음해 놓았다. 노씨는 ‘노랫말이 다소 촌스럽긴 하지만 IMF 한파를 이겨내는 데 이만 한 곡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이렇듯 국가가 주도해서 대중의 정조(情調)를 만든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잘살아보세’와 ‘새마을 노래’다. 물론 1971년엔 21세 김민기의 ‘아침이슬’처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다짐하는 청춘이 있었다. 같은 해 25세 송창식의 ‘고래사냥’처럼 일단 “자, 떠나자!”며 소리친 청춘도 있었다. “동해 바다로” 떠나자는데 “고래 잡으러”라니 뜬금없다. 하나 그때 거기에 그대로 있다가는 미칠 것 같으니까 그랬으리라. 1974년 9월27일 조선일보 ‘젊은이 발언’엔 23세 양희은(대학 휴학, TBC 팝송다이얼 DJ)의 글이 실렸다.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다. 어떻게 고등학교는 간신히 나왔는데, 대학은 입학했는데, 학비는 없고… 어렵게 자란 아이들끼리 모여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며 사는 방법을 얘기하다가 우리는 우리끼리 노래가사를 만들고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영화 <쎄시봉>으로 당시의 청춘 연가가 2015년에 새삼 유행이라지만 노래 ‘고래사냥’은 영화에 없다. 그 노래는 하길종 감독의 19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마지막 장면 “동해 바다” 거기에 멈췄다.

20대 통기타 가수들 ‘우리들’은 1970년대 중반 청년문화 논쟁의 한 주역이었으나 이젠 60대 중반이다. ‘우리들’이 그때 고래를 보기는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17년 전 ‘잘살아보세’를 녹음했던 27세 노상도씨는 40대 중반일 텐데 어찌 살고 있을지. 올해 마흔이 된 1975년생에겐 떠날 광야나 바다가 아직 있을지.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1988년에 나서 서른을 앞둔 그대와, “대학에 입학”해서 “모두 가난”해질 20대 너희는 설 연휴를 어찌 보냈을지.

연휴 첫날 아침이었다. 황선준 스톡홀름대 정치학 박사의 한국일보 칼럼을 읽었다. “스웨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받는 딸”의 근황과 이곳에서 자란 청년을 비교한 글의 결론은 “젊은이를 버린 나라는 미래를 버린 나라”다. 두 나라는 “부모의 역할”(자식사랑 방법)과 “국가의 역할”(청년 복지제도) 차이로 운명이 갈렸다. “금자탑”이 즐비한 이곳의 오늘을 사는 젊은이가 “태양 너머에 잘사는 나라”의 또래와 딴 운명을 타고났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설 특집 라디오 방송에 나갔다가 1995년에 나온 이소라의 ‘난 행복해’를 끝 곡으로 골랐다. “날 용서해”로 시작해 “제발 행복해야 해”로 절정에 오르는 이 감정의 진심은 “다음번엔 나 같은 여자 만나지 마”다. ‘나 같은 남자’ ‘나 같은 부모’ ‘나 같은 나라’로 변주되는 환청에 젖어 노래를 들었다. 용서를 빌고 행복을 빌면 그만일까. 다시 새해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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