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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는 KBS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의 한 코너 부제였다. 2009년부터 방영돼 2013년 종영하며 97가지 미션을 선보였다. 독일 일간지 기자 셋이 쓰고 2011년 번역 출간된 <남자의 자격>(지상사)은 ‘남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부제로 달았다. 책에는 111가지가 나온다.

출판사 서평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때로는 본드처럼, 때로는 맥가이버처럼, 때로는 베컴처럼, 때로는 쾌걸 조로처럼, 때로는 로빈 후드처럼, 때로는 이소룡처럼 변신할 수 있는 남자가 진정 멋진 남자”라고. 이들 6명 남자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하는 남자라니.

111가지를 알거나 101가지를 해서 ‘남자의 자격’을 갖추자니 부질없어 보인다면 다음 두 가지를 확실히 잘하는 남자에 대해선 한번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육아를 잘하는 아빠’와 ‘삼시 세끼를 잘 만드는 남편’이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2013년~)의 송일국과 tvN <삼시세끼>(2014년~) 어촌편의 차승원이다. 44세 송일국은 이제 삼둥이 아빠가 됐고, 45세 차승원은 차줌마가 됐다. 육아와 요리는 40대 ‘남자의 자격’ 중에서도 핵심 자격으로 떠올랐다. 삼둥이 아빠가 보여주는 육아의 끝과 차줌마가 보여주는 가정식 요리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반향이 크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작년 방송사 시상식에서 시청자 투표로 ‘최고 프로그램상’을 받았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다. 지난해 12월 한 구직사이트에서 직장인 72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삼둥이와 아빠는 ‘가장 큰 웃음을 준 인물’ 1위를 차지했다. <삼시세끼> 어촌편은 방송사 역대 시청률 최고 기록을 깨며 지상파를 포함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올해 1월 한 쇼핑사이트는 조리기구를 구매한 남성 고객이 전년 동기 대비 72%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조리기구뿐 아니라 각종 식자재와 소스는 물론 계량 스푼과 컵, 조리용 온도계의 판매량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

증후군이라 불러야 할 이 현상에는 송일국과 차승원이라는 훤칠한 도시 이미지의 상남자 배우가 보여준 반전 캐릭터 요인도 있겠다. 하지만 ‘육아하는 아빠’와 ‘요리하는 남편’에 대한 엄마들과 아내들의 욕구가 그만큼 컸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통계청에서 5년에 한번 국민의 ‘생활시간’을 조사하는데 2014년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고 2009년 결과가 가장 최근의 것이다. 2004년과 비교할 때 맞벌이 부부 중 남편의 가사노동은 하루 평균 32분에서 5분이 늘었다. 아내는 208분에서 8분이 줄었다. 전업주부는 385분에서 7분이 줄었고 그 남편은 8분이 늘어 39분이었다.

전국 약 8100가구의 만 10세 이상 가구원 약 2만1000명을 조사한 결과다. SBS의 심영구 기자는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가사노동은 만악의 근원”이란 표현을 썼다. 출산율 저하가 ‘만악’이라면 ‘근원’은 가사노동이라는 말이다. 육아와 요리, 청소 등의 가사노동을 하는 아빠와 남편의 시간은 하루 40분 정도고 엄마와 아내의 시간은 3시간. 이 차이는 2014년 조사 결과 확 좁혀졌을까. ‘육아아빠’와 ‘요리남편’에 대한 남자들의 호감을 감안해도 아닐 것 같다. 2시간20분의 차이가 해소되기까지 조사결과의 패턴을 감안하면 5년마다 남자의 가사노동 시간이 8분씩 는다면 45년이 걸려야 부부의 가사노동 시간이 같아진다.

그럼 삼둥이 아빠와 차줌마에 남자들이 투영하는 열망은 무엇일까. 엄마가 사라진 48시간 동안 아빠 홀로 아이를 돌보는 이 상황, 목포에서 배로 6시간 떨어진 섬에서 4박5일간 남자 서넛이 세끼를 자족하는 이 상황이다. 3주마다 한번씩 주어지는 48시간과 3주간 농어촌에서 지내는 매주 4박5일은 아빠와 남편에겐 ‘자유’의 시간이다. 육아와 요리는 즐거운 놀이가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엇을 한들 즐겁지 않을까. 이것이 40대 남자의 로망이 된 사회다.

tvN 예능 <삼시세끼 어촌편> 공식 포스터 (출처 : 경향DB)


이들 프로그램을 기획한 강봉규 PD와 나영석 PD는 엄마와 아내의 결핍 이전에 아빠와 남편의 욕망을 앞서 간파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만큼 ‘육아아빠’와 ‘요리남편’은 아빠들과 남편들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해서 대리만족이 더 크다. 가사노동의 양성 평등이 정답이지만 돈벌이 소모품의 하루살이를 건사하기에도 벅찬 부부만 달랑 남아서 상대의 개선을 바라는 풍경은 우리네 생활세계의 슬프고도 웃긴 나날의 자화상이다. 국가와 민족을 탓할 수 없다면 부부는 매일 싸우면서 도를 닦는다.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피로사회’와 ‘여가사회’의 엄청난 간극을 무대로 ‘종내 파괴될 것인가 다시 창조할 것인가’를 자문하며 ‘남자의 자격’을 찾는 중년이 있다면 이 책을 건네고 싶다.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2003년)과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의 <아버지란 무엇인가>(2009년). 앞의 책은 부성의 권위와 상하 관계의 “동굴 속 황제”로 ‘완성’된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뒤의 책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고 ‘탄생’한 남자가 조화로운 삶을 위해 아버지의 정체성을 다시 창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늘도 육아와 요리는 계속되며 ‘남자의 자격’을 묻는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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