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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국립공원의 남창계곡을 헤맨다. 희귀한 노랑붓꽃을 찾아나선 길. 주야로 흘러가는 물에도 이 계곡이 파이지 않는 건 물가의 단단한 돌들 덕분이다. 겨우 어느 바위틈에서 노랑붓꽃을 만났다. 주어진 시간을 소화하고 또 어디로 떠나는 다소 추레한 모습이었다. 비바람, 벌레, 햇빛에 짓이겨진 꽃잎들. 그렇게 아름답게 허물어지는 꽃과 헤어져 투숙한 허름한 모텔.

초승달이 외롭게 건너가는 동네에서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EBS ‘세계의 명화’의 <화양연화>를 놓칠 수 없었다. 제목의 절반이 꽃이 아닌가. 이 영화는 뒷모습이 주인공이다. 아예 뒷모습으로만 슬쩍 처리되는 인물도 있다. 가슴을 파고드는 주제곡이 흐를 때면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과 등이 아담한 양조위의 뒷모습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목구비만으로 사람의 얼굴은 서로 충분히 다르다. 얼굴 밑의 욕망은 한 끗발의 차이도 없겠지만 그 처리 방식에서 사람은 또 달라진다. 뒷모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정작 온전히 보지 못하고 산다. 나도 고개 바짝 들고 앞만 보고 살아온 버릇이기에 당장 나의 뒤를 고르라면 자신이 없다. 제대로 본 적 없는 저 뒷모습이란 그간의 잘못과 패악, 후회와 아쉬움이 쌓인 창고일 것이라고 희미하게 짐작할 뿐. 그래서 등에서 뻗어내린 그림자는 항상 어둡고 검다고 여길 뿐. 그러니 또한 뒷모습은 누구에게나 다 닮은꼴이라서 저 영화를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기도 하리라.

낮엔 꽃, 밤엔 영화, 그것도 화양연화. 지나고 보면 어젯밤 그 싸구려 모텔의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앞의 하룻밤도 어쩌면 화양연화의 한 조각이 아니었을까. 주제곡을 흥얼거리며 내장사로 향하는데 운전하는 꽃동무가 큰 발견이라도 한 듯 외친다. 우리가 지금 달리는 이 길이 화양로네요! 검색해 보니 전북 순창군 복흥면 화양리. 무슨 신기한 인연이라도 엮어진 듯, 화양저수지 근처 마을에 차를 세웠다. 도로에 바짝 붙어 속절없이 휘청거려야 하는 팥꽃나무를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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