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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날氏다. 그이는 날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공중의 한 장막을 걷고 나타난다. 그렇다고 봄마저 그런 건 아니다. 봄은 언제나 대지를 무대로 한다.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들, 연두에서 초록으로 번지는 산색이 이를 증명한다. 뉴스 화면을 통해 이 알뜰한 계절을 미끌미끌하게 구경하는 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오늘은 나에게 많은 식물 공부를 이끌어주시는 꽃동무의 누님의 농장을 찾아간다. 김천 농소면 봉곡리의 자두꽃을 잠깐 본 뒤 인근 백마산의 골짜기를 훑기로 한 것이다. 자두는 자도(紫桃)에서 변한 것으로 오얏나무라고도 한다. 오얏(李)은 내 성씨에 꽉 맞물려 있는 것이니, 신축년의 봄을 저 자두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영접하자니 존재의 바닥을 일깨우는 흥분이 안 일어날 수 없었다.

참 따뜻한 햇살에 현명한 ‘샙띠마을’ 들판. 드문드문 백목련, 매화, 벚나무가 산촌처럼 흩어져 있다. 멀리 어느 비닐하우스 안에서 고단한 손길이 분주하다. 한 분은 물결 같은 이랑을 만들고, 또 한 분은 가슴께에서 분주히 무엇인가를 꺼내 뿌리고 있다. “농부는 농사를 지으며 조금씩 자연으로부터 어떤 비밀을 이끌어낸다”(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고 하였는데, 천하의 봄은 바로 이곳으로 모여 휘돌다가 천지사방으로 일제히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누님의 농장에는 순서가 있었다. 자두나무는 활짝 피어 부지런한 벌들을 불러들이고, 복숭아나무는 아직 세상을 향한 포부로 두근거리는 꽃봉오리 상태다. 휘황한 자두꽃 아래에서 두 분의 상봉이 정겹다. 니도 머리가 점점 할배가 되어가네. 와 이리 허옇노? 자두보다 더 붉은 옷에 숱 많은 누님은 참으로 곱게 익은 어린 왕자 같으시다. 봄마다 자두꽃만 보면 이렇게 마음이 푸근해진다며 빙그레 웃는 얼굴에 그 비결이 슬쩍 드러나는가.

세상의 깊이는 깊은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눈앞에 숨어 있다. 냉이와 달래와 쑥이 떠들썩하게 올라오고, 자두꽃 내음이 물씬하고, 누님의 땀방울이 떨어진 지금 여기가 바로 그곳!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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