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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노랗고 붉고 하얗게. 저 꽃들 속에서 올봄 특히 찾는 게 있었다. 남산으로 나서면서 혹 산수유를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다. 세상에 참 흔한 게 산수유이지만 막상 찾으려니 눈앞에 없기도 하다.

둘레길에 우세한 건 벚꽃과 개나리. 없는 것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핀잔이라도 주려는 듯 죽은 나무가 찾아왔다. 남산골 한옥마을로 내려가는 골짜기쯤에 탈색된 나무가 있다. 모두가 활짝 피어나는 마당에 푸르름을 상징하는 일군의 대나무였다.

작년에 퍽 희한한 일 하나를 겪으면서 우연히 집어 든 <삼국유사>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꼼꼼히 읽어나가자니 내 마음에 사생(死生)과 성속(聖俗)이 함께 구비된 남산보다 더 넓은 동네 하나가 들어서는 듯 망외의 소득이 있었다.

그중의 한 대목. “경문왕이 즉위하자 왕의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홀연 길어졌다. 왕비와 궁인들은 알지 못하고 관(冠) 만드는 장인만 알았다. 그는 평생 남에게 말하지 않다가 죽게 되었을 때, 도림사 대나무 숲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이후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여기까지는 익히 아는 바인데 뒷이야기가 더 있다. “왕이 이를 몹시 싫어해서 대나무를 모두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면 단지 이런 소리만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아무리 왕일지라도 바람은 자르지 못하고 나무만 베어서 그런 것일까. 국립극장까지 오도록 끝내 산수유를 보지 못했다. 남산의 속살에 해당하는 구간을 더 걷고 내려와 두더지처럼 지하철을 탔다. 잠깐의 선잠이었지만 지하의 덕분으로 퍽 개운하다. 지상으로 나와서 아파트를 지나는데, 어라, 노란 산수유가 아닌가.

하루 종일 봄을 찾아 헤매다가 돌아와 집 앞에 핀 매화를 보고 봄을 발견했노라는 옛시가 있다. 저 심오함에 한나절 외출을 포개는 게 조금 낯이 간지럽지만, 대나무-산수유-매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귀에 꽂으며 귀가했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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