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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아야 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항상 빠듯하게 길을 나선다. 그날도 학교 강의를 마친 뒤, 뭔가를 분주하게 서두르다 길을 나섰다.
이대로 길만 막히지 않는다면, 약속에 늦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차를 몰아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방향을 잡아 고속도로에 올라서려던 때, 양복을 차려입은 분이 고급차 옆에서 긴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 무슨 일이지? 차가 망가졌는데 휴대전화가 없나?’ 이런 생각이 찰나에 스쳐갔다. 급하게 고급차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니 손을 흔들던 분이 다가섰다. “사장님!” 일단, 사장님이라는 호칭부터 의심스러웠다. 요약하면, 자기가 골프채를 빼돌렸으니 싸게 사 달라는 말이다. 불현듯 1990년대 중반 처음 직장에 들어가 수습할 때 겪었던 민망한 기억이 떠올랐다.
노원구 노원역 근처의 풍경 (출처 : 경향DB)
대학 4학년 2학기에 한 잡지사에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글을 쓰는 일이 즐겁던 때였다. 그다지 잘 가는 곳은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노원역 앞 백화점 건너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승합차 문이 열리더니 착해 보이는 사내가 말을 걸었다. “잠시만요!” 내가 승합차로 납치될 만한 일은 없을 것 같고 해서 대답을 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사내의 얼굴에 웃음이 보였다. “저희가 미도파백화점에 모피 코트를 납품하는데, 두 벌을 빼돌렸어요.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런데 한번 보세요.”
그는 나를 끌고 승합차로 들어갔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빼돌렸어요’라는 단어가 나를 승합차로 들어가게 했다. 그들은 모피 코트 한 벌과 악어가죽 코트 한 벌을 보여줬다. “실수로 두 벌이 남았어요. 싸게 가져가세요. 원래 한 벌에 200만원짜리인데… 100만원에….” 모피 코트?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들은 다른 옷을 내보였다. “이건 악어가죽인데요. 두 벌에 100만원만 내세요. 저희가 회식이라도 하려고 그래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고급 모피와 가죽 코트를, 실수로 남겼는데, 두 벌에 100만원! 사내가 갑자기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 악어가죽에 댄다. “진짜 가죽이라니까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치고 말했다. “현금이 없는데요.” 사실 은행에 들러 뽑으면 될 일이었다. 나름 머리 굴린 작전이기도 했다.
“카드는 있죠?” “예.” “대리점에 가서 TV하고 비디오 사오세요. 그러면 대충 100만원어치 정도 되니까.” 새로운 제안이다. 이내 통장 잔액을 떠올렸다. 50만원 정도였을까? 난 승부사처럼 “카드는 없고, 통장에 40만원 정도 있는데…” 전체 금액에서 10만원을 다시 뺐다. “에이, 뭐 저희도 남은 거니까 그냥 40만원에 가져가세요.” 한 벌에 200만원인 옷을 두 벌에 40만원에 사게 되는 순간이다. 난 내 승부사 기질에 만족하며 은행으로 달려갔다. 맞다. 사기다. 그들에게 돈을 주고 받은 봉투에서 옷을 꺼내 보는 순간, 비로소 내 눈에 조잡한 옷이 들어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 출근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철훈아, 내가 속아서 옷을 샀는데 가져가서 너네 집 개 깔아줘라.”
1990년대 중반 노원역 사거리에서 당한 사기의 시작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었고, 끝은 ‘400만원짜리를 40만원에 사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었다. 연민에서 시작한 관심이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으로 들어선 순간 정상적인 사고회로는 모두 끊겼다. 사적 이익에 대한 욕망은 거대했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는 종이처럼 얇은 방어막이 불법성에 대한 이성의 작동을 막아버렸다. 그 뒤로도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휴게소에서 슬쩍 다가와 “저희가 납품하고 남은 물건이 있는데요”라고 말해도 따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골프채를 권유하는 양복쟁이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노원역 사거리의 추억이 백신이 된 듯하다. 연민을 이용하는 그들이 나쁜 건지, 불법적 사적 이익에 반응하는 내가 나쁜 건지 도통 모르겠지만.
박인하 |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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