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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 이 둘 사이에는 상대방의 주장에 승복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의 종교학자 존 호트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갈등, 분리, 접촉, 지지라는 네 가지 관점으로 구분한다. 그의 생각은 분리와 접촉에 가깝다. 과학과 종교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영역이 있다는 점 또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과학과의 ‘접촉’에 가장 적극적인 종교는 가톨릭이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가톨릭교회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다고 배웠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동설은 종교재판 회부의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오 시대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천문학의 가장 든든한 지원세력이었다. 태양천문학의 선구자 피에트로 세키는 성당 지붕에 설치한 천체망원경으로 별들을 관찰했던 이탈리아 신부였으며, 빅뱅 이론을 창안한 조르주 르메트르도 벨기에 출신 사제였다.

가톨릭은 19세기 말 진화론과 반목한 이래 과학과 신앙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포용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물론 낙태나 줄기세포 이용처럼 과학윤리를 둘러싼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적 진실 문제가 아니라 도덕률 차이에서 비롯된 충돌로 보아야 한다. 과학과 종교는 기본원리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좀처럼 섞이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그건 바로 환경이다.

과학과 종교의 메시지가 같을 수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정치를 움직이는 데 실패한 과학의 한계를 종교가 메울 수도 있다는 희망은, 발표가 임박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후변화에 관한 회칙에서 재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회칙에는 “기후변화는 과학적 현실이며, 인류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한 도덕적, 종교적 책무를 가진다”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세계의 시민들은 교황의 메시지가 성서적 문자주의에 갇혀 기후과학을 부정하는 가톨릭 보수파까지 설득할 수 있을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정치다. 국제사회는 오는 12월 파리 기후변화총회를 앞두고 정치 역량을 풀가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연합 등 37개 국가가 기후변화 대응 기여방안을 내놓았는데, 우리 정부도 다음주쯤 2030년 감축목표의 윤곽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정부가 준비한 안이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 정도라는 얘기가 들린다. 정부가 압축한 4개안 모두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2020년 감축목표를 뭉개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정도의 안이 그대로 확정돼 발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국가, 다른 나라의 노력에 묻어가려는 파렴치한 무임승차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이클레이(ICLEI, International Council For Local Environmental Initiatives) 세계기후환경총회가 열리고 있는 지난 4월,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총회 참석자들, 일반 시민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서울시는 총회에서 오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 대비 40% 감축하기로 선언했다. (출처 : 경향DB)


물론 이번 엉터리 안 마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산업부 장관은 일부 대기업들로부터 잘했다는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될까? 신기후체제 협상에 찬물을 끼얹은 표리부동한 정치지도자 취급을 받게 된다. 이달 중순 미국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박 대통령은 따가운 시선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남은 임기 동안 기후변화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도 못하는 불행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지 모른다.

박 대통령에게는 아직 최종 결정의 기회가 남아있다.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프란치스코 교황 수준의 성찰적 인식과 결단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G20 정상회의 등을 통해 2020년 감축목표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만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메이드인 코리아 제품이 고탄소 낙인이 찍혀 수출길이 막히는 사태를 방지하고 국가 이미지 훼손에 따른 무형의 손실을 막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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