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겐 여든여섯의 연로하신 아버지가 계신다. 아버지는 학도병이자 직업군인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로 고등학교 재학 중 학도병에 자원하셨다가 6·25 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영천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으셨다. 가난한 집 장남이라 더 공부할 여건이 되지 못했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교를 졸업한 후 바로 직업군인이 되셨다. 육사를 나온 것도 아니고 윗사람에게 허리 굽히고 청탁하는 성격도 못되어서 10년 이상 대위로 계셨다. 그러다 지뢰 폭발사고로 머리와 다리를 크게 다쳐 전역하셨다. 몇 년 후 국가유공자가 되셨다. 이런 인생 이력을 가진 아버지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래서 내가 대학에 진학한 후 아버지와 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의견이 갈린 적이 많다.

그런데 아버지와 내가 의견이 같은 게 있다. 바로 ‘탈원전’이다. 2005년 11월2일 경주에선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을 위한 주민투표가 있었다. 당시 경주시는 찬성률이 89.5%로 투표지 네 지역 중 가장 높아 방폐장 유치에 성공(?)했다. 그때 아버진 반대표를 던지셨다.

“나는 반대한데이. 근데 반대한단 말 아무 데도 못한다 아이가. 여 사람들 마카 찬성표 찍는다 안카나. 돈 몇 푼 준다꼬. 도대체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기나 하능가 몰라. 방사성물질 그거 얼마나 오래 간다꼬. 근데 그런 정보가 없어. 그카이까네 여 시골사람들이 알 턱이 있나?”

아버지와 난 그때까지 원전이나 방폐장에 대해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내 전공이 에너지정책이고 우리집이 월성 원전이 있는 경주시에 속하는 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주민투표권이 있었기에 그제야 궁금해서 여쭤봤었다.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방폐장 유치 쪽 의견만 들린다며, 문제라고 하셨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탈원전 이야기가 한창이다.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기에 오히려 반갑다. 막혀 있던 물꼬가 터진 느낌이다. 전기는 이제 필수재가 되었고 전기의 30%가 원전으로 생산되는데 원전이 위험하다면 그 위험을 계속 감내할지 말지, 원전 아닌 대안이 가능한지 어떤지,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 지난 대선 때 유력 대선주자 다섯 가운데 넷이 탈원전 공약을 제시하면서 에너지전환 논의가 이제야 사회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큰 변화다.

며칠 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원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아버지는 원전 자체를 반대하신단다. 그래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아버지 군인 아니었나. 군대에 있을 때 원자학이라고 다 배웠다 아이가. 원전이나 핵무기나 원리는 똑같데이. 방사성물질 그거 참말로 무섭고 오래 간데이. 폐기물 치우는 방법도 없고. 그거 말고 전기 생산하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인데 뭐할라꼬 그래 위험한 거 쓰노? 이제라도 바꿔야제. 후손들이 무슨 죄가 있노?”

그렇다. 원전이냐 탈원전이냐는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언론엔 은근히 탈원전 논의를 이념 대립으로 몰아가는 참으로 몰상식한 시도도 있다. 이제 그런 유치한 짓은 그만두자. 이건 우리의 안전과 생명이 걸린 문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를 넘어 국민 전체, 나아가 이 땅에서 살아갈 미래세대 전체의 문제다. 그동안 유통된 원전 관련 정보가 과학적 사실인지 제대로 된 검증이 없었다. 이제야말로 투명하게 공개된 균형 잡힌 정보를 놓고 제대로 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원전 추진 측 자료가 다가 아니다. 최근에 ‘안전한 세상을 위한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에서는 ‘팩트 체크’란 이름으로 자료를 내고 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정보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어느 쪽이 보다 많은 걸 제대로 고려하고 있으며 진정으로 지속가능한지를.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