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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탈성장’ 논의가 본격화할 수 있을까. 작년 세밑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한 북콘서트 주제가 탈성장이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이다. 사실 성장이라는 약물을 주입하지 않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성장 중독사회에 대한 비판은 우리 주변에서도 차고 넘친다. 처방으로 제시된 탈성장도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지금보다 탈성장 담론이 훨씬 더 유행했다.

그래도 최근 출판계가 탈성장에 기울이고 있는 관심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경기 침체 속에서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성장론이 주목받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소득주도성장, 동반성장, 포용성장, 내생성장, 공정성장, 복지성장, 국민성장. 성장주의의 폐해를 의식한 이른바 ‘다른’ 성장론들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대세를 이룬 지 오래다. 성장은 더 나은 삶을 담보해주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공감대는 적어도 과거에 비해서는 꽤 넓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성장지상주의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경기도지사를 지낸 한 여당 정치인은 “친기업 아닌 것은 다 말장난”이라며 새로운 성장론들을 싸잡아 폄훼했다. 야권의 한 국회의원은 최근 대권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성장담론들은 “성장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라며, “한국적 민주주의가 독재하자는 이야기였듯이 수식어가 붙는 성장론은 다 가짜”라고 딱지를 붙였다. 수십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성장담론의 불패신화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수식어가 붙는 성장론은 가짜가 아니라 죄다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성장론은 성장론일 뿐이다.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경제성장률에 대한 집착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성장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민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성장주의와 정상적인 성장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무제한적인 성장 또는 성장을 위한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아닌 ‘선택적 성장’이라면, 다시 말해서 산업문명이 파괴했던 자연을 치유하고 빈부격차를 줄이는 ‘질적 성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재생에너지와 유기농업의 ‘성장’이 탈성장 사회의 주춧돌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탈성장을 성장의 산술적인 역, 즉 마이너스 경제성장률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원래 탈성장이라는 용어는 성장과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정치슬로건이었다 한다.

오늘날 탈성장은 녹색당조차 입에 올리길 꺼리는 개념이다.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고, 해석을 둘러싸고 극좌에서 극우까지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런 점으로 보면 박정희 체제의 핵심이 성장지상주의에 있다 하더라도 이번 대선에 나선 주자들에게 탈성장 주장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수 있다. 그래도 시대정신의 교체를 주장하는 대선주자라면 두 가지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째, 몇퍼센트 성장률과 몇만달러 소득 목표에 목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과거와 같은 성장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저성장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솔직하게 국민 앞에 고백해야 한다. 성장주의는 이미 삶의 질을 망가뜨릴 정도로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확신과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둘째, GDP 외에 삶의 질과 만족도를 반영할 수 있는 국가 지표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통계청이 작성한 ‘국민 삶의 질 지표’가 있으니 새 지표를 만들 필요도 없다. 책상 서랍에 갇혀 있는 것을 꺼내기만 하면 된다. 대선주자들의 ‘다른’ 성장론이 성장주의의 변종인지 탈성장의 씨앗인지는 이 두 가지 제안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시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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