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올겨울에도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를 막기 위한 ‘예방적 살처분’으로 닭과 오리 수천만 마리가 매몰되었다. 이제 조류독감은 겨울이면 치르는 연례행사가 되었고, 매번 방역인력 부족과 철새를 탓하며 한바탕씩 난리를 치른다.

AI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근원은 고도의 밀집·밀폐 사육방식인 공장식 축산에 있다. 하지만 구제역이나 AI가 터지면 육류나 계란 부족을 걱정하지, 축산공장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과 같은 육류 수요가 계속되는 한, 공장식 축산밖에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축을 생산하는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면, 누구나 그 참혹한 사육 공정에 말문이 막힌다.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라도 고기를 만들어 먹겠다는 우리는 누구인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현실의 정직한 대면은 공장식 축산의 포기와 식습관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대개 비현실적인 요구로 간주되고 만다. 진실은 외면되고, 문제는 계속된다.

지난 12월에 개봉된 영화 <판도라>가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누적 관객이 450만명을 넘어선 <판도라>는 핵발전소 사고가 그야말로 속수무책의 가공할 재난임을 보여주었다. <판도라> 효과로 핵발전소에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지난 9월 월성핵발전소가 있는 경주에서 일어난 규모 5.8의 지진이 관객들에게 핵발전소 사고의 현실감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배우 김남길이 출연하는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NEW 제공

하지만 정작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정부에게선 핵발전소에 대한 진정 어린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수력원자력은 늘 하던 대로 수치를 내세우며 안전을 주장했고, 국민들의 ‘과도한 우려’를 우려했다. 경주 지역에 여진이 550회 넘게 이어지고, 향후 대규모 지진 발생 가능성이 예고되는데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월성 1~4호기를 기습 재가동했다. 당시 전기는 남아돌고 있었다.

<판도라>에서 설정한 규모의 지진과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사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사고가 일어나면, 우린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런 핵발전소 사고는 절대 없다는 주장은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부정하는 만용이거나 무지에 불과하다. 백보를 양보해, 사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속수무책인 골칫거리는 여전히 남는다. 아무리 핵발전소를 안전하게 짓고 운영해도, 핵발전을 하는 한 사용후핵연료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는 적어도 10만년 동안 세상에서 철저히 격리 보관해야 하는, 극히 위험한 고준위핵폐기물이다. 10만년은 인간이 장담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고, 핵발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안전한 핵발전소란 세상에 없다. 현실의 정직한 대면은 핵발전의 포기와 생활양식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진실은 외면되고, 문제는 계속된다.

청와대와 재벌을 정점으로 한 이 땅의 권력자들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 “이게 나라냐.” 자괴감과 분노로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대통령 퇴진 요구는 사회의 근본 틀을 바꿔야 한다는 각성과 다짐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근원적 변화를 이루려면 제도의 개혁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에 대한 깊은 성찰도 필요하다.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자기이익을 게걸스럽게 채워온 권력층의 행태는 어느새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쳐왔다. 한 사회의 지배층의 오랜 관행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관행이 되기 쉽다. 저들의 탐욕은 무한한 물질적 풍요라는 탈을 쓰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지 않은가.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을 피해 기존의 질서가 준다는 풍요와 편리에 안주하려는 내 모습은 저들에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새해, 자신에게서 ‘저들’을 말끔히 들어내겠다는 다짐으로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아름다운 ‘우리’들을 보고 싶다.

조현철 서강대 교수·신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