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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 ‘야생초 편지’ 저자
참으로 답답하고 우울하다. 지난달 이곳 칼럼 ‘녹색세상’에서 원전민간감시기구가 ‘무늬만 민간기구’라며 위원장만이라도 민간인으로 바꾸자는 글을 썼다. 그 뒤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가 어제 지역의 탈핵운동가들과 원전민간감시기구의 운영위원들이 조촐한 간담회를 가졌다. 영광지역에 감시기구가 뜬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어색하고 긴장된 초반이 지나자 슬슬 입이 풀린 운영위원들이 자기 변호인지 아니면 자탄인지 모를 고백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가 10년 넘게 감시위원으로 있지만 어떤 때는 정부의 홍보위원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정보를 저쪽에서 틀어쥐고 사고가 난 후에야 통보해주는 식이니. 그것도 뉴스에 공개되는 정보에 한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니 사고가 나더라도 지역주민에게 먼저 통보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겁니다. 초창기엔 감시위원들조차 사고현장에 접근도 못했어요. 원전 관련 법규를 고치지 않는 한 이 상황은 개선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실 그동안에 문제가 되었던 원전사고들은 거의가 뉴스를 통하거나 아니면 원전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사적 접촉을 통해 밖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렇게 원천적으로 감시기능이 마비되어 있는 원전감시기구를 왜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10여년 전 치열한 반핵투쟁의 성과물이자 타협물로 얻어낸 민간감시기구건만 당시의 반핵진영에서 감시기구의 내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탓이 크다. 물론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부 활동가들이 내부에 들어가 나름 치열하게 싸웠으나 자금과 행정력을 쥐고 있는 정부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고착되고 말았다.
(경향신문DB)
지금도 아쉬운 것은 그때에 왜 반핵진영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가이다. 영광에 민간감시기구가 만들어지고 나서 원전이 있는 다른 4곳의 지역에도 영광을 모델로 하여 감시기구가 속속 들어서고 이들 사이에 협의체도 만들어졌다. 이렇듯 민간감시기구가 만들어진 과정이나 운영방식을 보면 전형적인 정부 기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원래 민간 차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의 대중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정부에 의해 제도화된 기구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와 자활센터 등이 그렇다. 그러나 원전민간감시기구의 경우는 성격이 아주 고약하다. 군사시설 이상으로 엄격히 보안화되어 있는 원전시설에 민간인이 들어가서 마음대로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데도 이를 투쟁의 성과물로 제시하고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지나간 일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제한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어진 조건과 역량 안에서 최대한 노력하여 주민의 입장에서 원전사고에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과 방법을 개발해 끊임없이 정부를 자극하고 압박해야 한다.
간담회를 마치고 행여 탈핵활동가나 주민들이 감시위원회를 정부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백안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분들은 어쩔 수 없는 틀에 갇혀 있을 뿐이지 탈핵과 핵 안전성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향후 잦은 만남과 교류를 통해 주민 입장에서 감시기구의 위상을 높이고 그 역할을 규정하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입을 모았다.
대체로 개성이 강한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중이 절을 떠나듯’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결국 주민들을 위한 기구는 온전히 정부 몫이 되고, 주민과 정부 사이에 제도적인 소통구조가 없어지고 만다. 독립성이 요구되지만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정쩡한 중간지대에 있는 정부 기구들을 민간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원전민간감시기구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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