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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패스트푸드 네이션>이라는 영화를 봤다. <비포 선라이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만들고 에단 호크가 나온다는 이유로 골랐던 이 영화는 햄버거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사실을 토대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축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안전 문제, 비위생적인 육가공 과정, 오로지 ‘고기’가 되기 위해 사육되고 도살되는 소의 삶 등 맛있는 햄버거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들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적어도 소, 돼지는 먹지 말자고 다짐했다. 2년쯤 지속된 나의 육식기피가 막을 내린 것은, 지인의 아들 돌잔치에 갔을 때였다. 내 앞에 놓인 잘 익은 스테이크 앞에서 나는 결국 나이프를 들고 말았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나는 다시 육식주의자로 돌아왔다. 삼겹살, 치킨이 빠진 회식자리를 상상할 수 없고, “저, 채식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커밍아웃에 버금가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한국사회에서 고독한 소수자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돼지나 닭, 소의 복지보다 호랑이, 산양을 구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치맥’에 돈가스를 안주 삼아, 나는 멸종위기로 치닫는 야생동물들의 현실에 눈물 흘렸다. 소, 돼지, 닭에게는 미안하지만, 좀 더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수밖에. 급한 일들이 많으니, ‘나중’에 너희들에 대한 고민을 해 볼게.

적어도 수십년 뒤일 거라 생각했던 ‘나중’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2011년 초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 살처분. 무려 350만마리의 소, 돼지가 산 채로 매장되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른바 ‘농장동물’들의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난 어느새 새 작품의 기획안을 쓰고 있었다.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호랑이도, 곰도 아닌, 돼지였다.

‘왜 유독 돼지와 소, 닭들만 저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우리는 왜 돼지를 먹어서 돼지가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데도 그들이 어떻게 살건 죽건 천대하고 홀대할까?’ ‘돼지는 흔한 것 같은데 나는 왜 실제로 돼지를 본 적이 없을까?’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학자의 논리가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하루 세끼 밥 먹을 때마다, 장바구니에 뭘 담을지 결정해야 할 때마다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고민과 딜레마가 나만의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나와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초원에서 함께 노는 돼지 세마리 (출처 : 경향DB)


현대 소비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영역이 철저히 분리돼 있다. 값싸고 예쁜 셔츠 한 벌에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눈물이 얼룩져 있다는 걸 소비자들은 알지 못한다. 전기는 고압 송전탑과 그 지역 주민들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걸 도시인들은 모른다. 마트에 진열된 ‘신선육’을 고르는 사람들에게, 실제 살아있는 돼지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우리 가족이 먹는 고기가 어떻게 길러지는지 알고 싶었다. 옷을 살 때도 성분표를 보고 사는 내가, 그동안 유독 고기에 대해서만 그토록 관대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고깃집은 즐비한데 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이 없다는 것 또한. 나는 돼지에 대해 알고 싶었고, 돼지를 만나러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들에게 돼지인형이 아니라 진짜 돼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돈가스 마니아의 돼지 찾아 삼만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5월 초 극장 개봉하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노골적인 영화 홍보로 비칠 위험을 감수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돼지와 호랑이, 인간의 행복이 한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고통에서 구출하여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해야 할 존재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돼지이다.


황윤 | 다큐멘터리영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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