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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상]텃밭이 진짜 강의실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창밖 옥상을 볼 때마다 맥박이 빨라졌다. 지난해 여름 방수공사를 마치고 초록색 칠을 해놓은 뒤로 부쩍 심해졌다. 문전옥상을 문전옥답으로 만들어야지. 4층 복도에서 내다보이는 3층 옥상은 어릴 적 내 고향집 텃밭보다 두 배는 컸다. 1층에 실내 농구코트가 있으니, 80평은 족히 넘을 것이다. 저기에 흙을 덮든지 화분을 갖다놓으면 그대로 밭이 될 텐데…. 옥상을 마주할 때마다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경향신문 DB


녹지 비율이 국내에서 가장 높은 캠퍼스. 설립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그 사이 새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60년 넘은 소나무가 그대로 서 있다. 교시탑의 목련도 30년 전 그대로였고, 내가 시를 쓰던 본관 뒤 연못과 숲도 여전했다. 그린, 에코 캠퍼스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3년 전 모교로 올 때, 물오르는 신록을 보면서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텃밭이 없었다. 

도시농업, 도시경작이란 표현이 낯설지 않다. 멀리 쿠바와 북미, 북유럽 사례도 자주 소개된다. 국내에서도 도시농사꾼이 등장했고, 대안학교와 의료 분야에서까지 텃밭 가꾸기를 활용한다. 도로와 빌딩 틈바구니에서 땅을 일구다 보면 예상 밖의 수확을 얻는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을 거두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 텃밭은 장소다. 익명으로 존재하던 도시인들이 텃밭을 가꾸면서 서로 이름을 부른다. 텃밭에서 형성되는 인간과 자연(생명) 사이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번진다. 텃밭이 공동체를 위한 장소로 거듭나는 것이다.

경향신문 DB


대학은 오래된 장소다. 유례가 없는 압축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간직하고 있는 ‘장소성(場所性)’은 더욱 각별하다. 서울만 해도 대학을 제외하면 오래된 서사를 간직하고 있는 랜드마크가 거의 없다. 온통 새로 지은 건물, 새로 뚫린 도로다. 하지만 대학이라고 해서 장소성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학생들이 온전한 개인,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총체적 장소가 아니다. 입시지옥을 통과해온 청춘들에게 요즘의 대학은 ‘불안한 미래’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청춘들에게 ‘안전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록색 페인트 칠을 해놓은 창밖 옥상부터 땅으로 바꿀 생각이다. 우선은 화분 몇 개에 대여섯명 규모로 출발할 작정이다. 고추 모종을 심으면서 지구온난화를 들먹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에너지와 식량 문제를 환기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오이를 가꾸는 학생이 하늘을 보며 ‘비가 오셔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리게 된다면, 도시는 농촌이 없으면 단 하루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깨달을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엄연한 진리를 스스로 각인할 것이다. 

대학 건물 옥상과 운동장 스탠드를 비롯해 교정 곳곳의 공터를 땅으로 바꾼다면,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잃어버린, 아니 빼앗긴 감성을 되찾을 것이다. 감성은 외부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공감, 연민, 나눔, 연대가 다 감성에서 비롯된다. 감성이 죽는 순간 ‘나’는 세계와 두절된다.
정보와 지식만을 편식해온 청년들이, 경제논리에 세뇌당한 학생들이 흙을 뚫고 솟아오르는 떡잎을 보면서, 아침이슬을 머금은 상춧잎을 따면서, 감성과 지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온전한 개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개인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대학 텃밭은 미성년이 성년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강의실이자, 다양하고도 건강한 관계가 형성되는 열린 캠퍼스다. 

장미꽃이 아름답지만 감자꽃 또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상상한다. 대학마다 텃밭 강좌가 생겨나고, 청춘들이 도시농사꾼들과 어우러지는 날을. 그리하여 주말마다 대학 구내에 장터가 서고, 절기마다 도시텃밭 곳곳에서 동네잔치가 열리는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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