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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대권 | ‘야생초 편지’ 저자 

학창 시절 함께 그림을 그렸던 친구로부터 서울 북촌에 있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도자기기획전을 열고 있으니 와보라는 연락이 왔다. 친구는 지난해에 경기도 이천에서 열리는 국제도자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았으나 출품작의 예술적 의미보다 정치적 전시효과에 더 신경을 쓰는 주최 측과 갈등을 빚다가 도중에 사퇴한 바 있다. 이 전시회는 말하자면 그때에 자신이 직접 섭외한 작가들을 따로 모아 뒤늦게 여는 것인 셈이다. 처음엔 그렇고 그런 아방가르드 기획전이려니 하고 들어섰다가 예상치 않은 충격과 감동을 먹고 평소 함부로 불렀던 친구를 새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해에 친구의 의도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공무원들 가운데 이 칼럼을 읽는 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전시장엘 꼭 가보시길 바란다. 

사실 이 전시회는 도자기라 하면 대갓집 안방에 고이 모셔있는 값비싼 백자항아리나 각종 다기류만을 생각하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다소 난해할 수도 있다. 전통적 의미의 도자기라곤 전시장 초입에 늘어놓은 몇 점의 백자항아리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난해한 현대미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창작 동기나 기획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도자기라는 물성의 다양함에 놀라게 되고, 또한 허를 찌르는 작가의 상상력을 찬탄하게 된다. 가령 맹인들이 손으로 더듬어가며 만들어낸 코끼리상이나 비누로 만든 도자기는 그야말로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작가의 코너에 가니 도자기는 없고 흰 벽에 동영상만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새하얀 도자타일로 뒤덮인 자기집 욕실을 산산이 부숴 그 조각들을 세숫대야에 가지런히 담아놓았다. 동영상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더니즘의 비인간성과 그 해체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구워놓은 맛있는 빵이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먹었는데 그것 또한 작품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폭격 연습을 위해 만든 세라믹폭탄을 이용해 그 안에 밀가루 반죽을 넣고 빵을 구워낸 것이다. 작가는 빵 말고도 그 안에 각종 씨앗을 넣어 공중에서 투하하는 작업을 통해 폭력의 도구가 살림과 평화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16명의 작가와 5개의 프로젝트 그룹이 참여한 이 전시회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끈 작품은 경기도 팔당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만들어 전시한 20여개의 두상이다. 그 교장선생님은 해마다 졸업하는 학생들의 두상을 직접 만들어 졸업식 때 나누어 준다고 한다. 과연 두상의 뒷면에는 학생들의 이름과 장래 희망이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눈초리와 제각각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작가의 행복어린 제작과정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성지중고 개화캠퍼스에서 열린 ‘제자사랑 세족식’ l 출처 : 경향DB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왕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육현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제는 선생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벌어진다. 적어도 두상을 만들려면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일일이 만나 이리저리 살펴보고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 아무리 창작열이 넘친다 해도 제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깊은 감동에 젖어 미술관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나라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이용해 우리 아이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하나씩 해준다면 아마 그 기억 때문에라도 커가면서 잘못된 길로 빠질 확률이 훨씬 낮아지지 않을까 하는. 선물은 조각처럼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 음미할 만한 명구를 손수 적어 작은 액자에 담아 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뿐 아니라 선생님 자신에게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사랑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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