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 해를 정리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자꾸만 지난 일 년을 돌아보게 되는 나날. 연말에 함께 읽고 싶은 소설이자 올해 읽은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로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릿터’ 2022, 10/11월호)를 소개하고 싶다.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의문을 품고 다르게 살아보려는 존재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물방울도 그렇다. 자고로 물이라면 강, 바다, 비, 눈, 수증기, 얼음으로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는 법. 지구 어디에선가 발생해, 더 커다란 물과 합쳐지거나 더 작은 물로 나뉘며, 기화되거나 액화되면서 형태를 바꾸고, 거듭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물의 운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그 운명을 거슬러 강물도 바다도 비도 눈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여자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다. 막 서른이 되고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메이가 흘린 눈물 한 방울로 태어난 주인공은 평생 메이의 눈물로 살고자 한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기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추구를 멈추지 못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두려운 게 아냐. 나는 메이를 계속 기억하고 싶어.” 

그렇게 물방울의 여정은 시작된다. 지난 생에 이미 메이의 슬픈 눈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메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저 사라져버리지 않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시 메이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다른 물의 형태로 순환하기를 거부하고 온 힘을 다해 버틴다. 더 큰 우리가 되자는 강물의 부드러운 제안을 거부하고, 검둥오리의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알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오고, 다른 물과 섞이지 않기 위해 비닐을 쓰면서까지. 물방울은 결국 바다에 휩쓸려가지만 메이를 향한 강렬한 마음은 오히려 바다 전체를 물방울의 존재감으로 동화한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져서 스스로 바다가 되어버린 눈물 한 방울의 이야기라니. 이 고집스러운 물방울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물방울은 바다와 해일을 거치고 구름이 되어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는 메이를 발견한다. 그러나 저 멀리 하늘 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붉은 끈을 나뭇가지에 달아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다는 것. 가볍고 연약해진 구름이 되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물방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향해 떨어져내리는 일. 이 조그마한 물방울이 메이를 살렸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를 인간인 메이의 입장으로 뒤집어 읽는다면 어떨까.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흘린 눈물 한 방울이 죽음을 결심한 순간에 다시 찾아오는 이야기. “죽은 너를 향해서든 산 너를 향해서든 상관없이 나는 너를 향해 하강한다”고 말하며 다가오는 아주 작은 존재를 만난 이야기.

누군가는 너무 과하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한 존재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나 장대한 여정이 꼭 필요한가? 그러니까 온 지구의 강물과 바다와 해일과 구름과 비를 아우를 만큼의 규모가, 세계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의 부피가 반드시 필요한가? 그러나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이렇게 대답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필요하다고. 무언가를 원해본 적도 없는데 빼앗겨버린 이, 무언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끝나버렸다고 느끼는 이, 다들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인데 혼자 멈춰있다고 생각하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규모와 부피가 소요된다고.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는 일은, 그래서 그 존재를 살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운명을 거스르고 무수한 환생을 거치며 지구를 순환할 만큼의 이야기가 요구되는, 무척이나 거대하고 웅장한 일이라고 말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연재 | 직설 - 경향신문

627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기사를 구독하여 새로운 기사를 메일로 먼저 받아보세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 초기화

www.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