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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긴 연휴 동안 마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저녁마다 집집이 마당에 불이 환했다.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도 나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자동차 트렁크에서 집 마당으로 짐을 날랐다. 할매 할배들도 바빴다. 챙길 것이 많고, 볼 것이 많고, 짬짬이 이야기도 풀어놓고.

“추석도 추석이라고는 별로 안 하고, 그냥 팔월이라고 했지, 팔월. 아직 일이 바쁘니까. 먹고 노는 거는 백중이 크고. 백중에는 집집이 풀 거름 마련하고 나서 놀고, 추석은 식구들하고, 친척들하고 지내는 날이고 그랬지. 추석에는 집안 살림 싹 깔끔시럽게 해야지. 여기서는 송편 같은 거는 잘 안 해 묵었어. 송편 말고, 올벼 가져다가 콩고물해서 찰떡하고, 박나물하고, 토란국 끓이고 그랬지.” 추석이 가까워오면 그 바쁜 때에 집안 정리하는 것부터 한다고 했다. 이불 홑청을 다 벗겨서는 삶아 빨아서 가을볕에 말려 너는 것부터. 마당에 희고 너른 광목이 펄럭이는 것으로 명절이 시작인 셈이다. 문짝을 하나씩 떼어다가 종이를 벗기고, 수세미로 문살을 하나씩 다 문질러 닦은 다음 새 종이를 바르기까지 하는 집도 있었고. 새 종이를 발라 문틀에 끼우면 방안으로 맑은 빛이 든다. “밝은 보름밤이면 문살이 더 빛이 나지.” 이곳에 이사를 와서 낡은 집을 고치고, 새 문종이를 발라 잠이 들었던 날에도 달빛이 밝았다. 10년 지난 지금도 종이 바르는 문짝을 쓰고 있으니 할매 하는 소리를 조금은 알아듣는다.

추석맞이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일찌감치 모여 청소를 했다. 도로 공사 때문에 방앗간이 허물어진 첫 번째 추석. 공사판을 앞에 두고 지난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마을 사람들끼리야 백중에 더 놀아. 추석이야 피붙이 보는 날이잖아. 그러니까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노는 날은 백중이지. 동네 사람들끼리 보신하고, 놀고, 그랬어. 아이들도 그날 기다리지. 먹을 게 많으니까. 냇가 좋은 마을은 천렵도 하고.” 설날 가까운 대보름이 그랬던 것처럼, 추석 가까운 백중은 여름 대보름 같은 날이었을 터. 하지만 대보름은 남았어도 백중은 이름만 남았다. 이제는 들에서 일하는 사람 먹으라고 참을 마련하는 일도 없고, 냇가에 모여서 천렵을 하는 일도 보기 어려우니.

새로 포장하는 길 아래 차곡차곡 사라진 논 이야기도 나온다. 누구네 집 논이 어쩌고 하다가, 당신들 어릴 적 한두 대목이 올라온다. “그게, 메뚜기가 흔했어. 논둑에 나가 가지고 메뚜기가 후두둑 날 때, 손으로 휙 거므면 몇 마리씩 잡혔다고. 그거 마른 냄비에 넣어서 구워 먹었지.” “도랑에 물 뺄 때, 이제 가서 소쿠리를 댄다고. 그러면 새우가 많이 잡혔어. 속이 다 보여. 자잘해 가지고. 익으면 빨개지는데 것도 맛이 좋았어. 벼 베고 나면 도랑에 흙 치면서 미꾸라지도 잡고, 논고둥도 잡고. 벼 베고 있으면 또 금방 밀, 보리 갈잖아. 그러니 그때는 기다렸다가 얼른 잡아왔지.” “참게가 이제 개울에 살다가 비 많이 오고 물 불고 그러면, 논으로도 막 가고 그런다고. 그러면 그냥 손으로 딱 잡고 그러지. 많았어. 제 딴에는 숨는다고 풀섶에 가 숨어. 그래 봐야 다 보여. 게나 꿩이나 한가지야.” 지금 농사짓는 논에도 약을 치지는 않는다. 10년 가까이 되었으니, 어지간한 벌레들은 바글대는 것 같고, 미꾸라지나 멧밭쥐나 이런 것들도 종종 보이기는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논에 나락 말고 이 많은 것들이 어디서 살았다는 것인지 어른들 말만 들어서는 도무지 알기 어렵다.

온갖 것이 모여 살았던 논도, 젊고 어리고 늙고 하는 사람들 골고루 모여 살았다던 마을도 이야기 몇 대목으로만 적어 둘 수 있을 뿐이다. 통계로 나온 숫자로만 헤아려 보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 동안 농사꾼이 농사지어서 얻은 농업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농사짓는 데에 써야 하는 돈(농업경영비)은 40%쯤 늘어났고. 아직 연휴는 끝나지 않았지만,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이들도, 젊은 사람들도 없고, 금세 깨 터는 소리, 밤 고르는 소리가 나고, 길가에는 고추며 토란대가 널렸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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